오피니언 시선 2035

취미는 등산이라고 말하는 당신께 사랑이 어떠실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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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혜미
JTBC 사회부 기자

내 이럴 줄 알았다. 뻐근해진 다리가 며칠째 풀리지 않는다. 지난 주말 제주도를 찾아 한라산에 올랐다. 오랜만에 연이은 휴일을 맞아 나선 길이었다. 엄청 신이 났는데 막상 뭐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시간 여유가 있을 땐 모처럼 취미 활동을 즐겨야지” 하고 생각한 게 산이었다. 주말마다 짬을 내 어렵지 않은 동네 산을 두루 올랐다. 누가 물으면 “취미는 등산”이라며 몸도 마음도 건강한 청년 행세를 좀 한 터였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오르는 길 5㎞ 지점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나의 얄팍한 취미’가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숨이 차오르자 우선 말이 안 나왔고 웃으려도 웃을 수가 없었다. 급기야 짧은 여행길에 왜 산을 탔는지 골도 났다. 사전을 찾아보니 취미란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이란다. 내 취미는 예쁜 수지가 광고하는 등산 전문 브랜드 옷과 장비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서부터 꼬인 걸까.

 사전대로라면 나는 취미라고 할 만한 일을 해 본 적이 별로 없다. 고등학교 때 취미는 뭐라도 읽으면 논술시험에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선택한 독서였고, 대학 땐 다른 나라 말이라도 할 줄 알면 취업이 될까 싶어 선택한 외국어였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많이 먹는다고 했다. 무언가를 뚜렷한 목적 없이, 전문성을 바라지 않고 해 본 경험이 부족한 내가 취미를 쉽게 봤다.

 올해 2월 한국갤럽이 조사한 한국인의 취미 1위는 등산이었다고 한다. 10명 중 1.5명이 “등산이 취미”라고 대답했다. 아무리 등산이 좋다지만 좀 무서운 일이다. 잘은 몰라도 이 중 0.5명 정도는 나랑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2위, 3위로 선정된 한국인의 취미 음악감상과 운동도 뻔한 감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대로 놀아 본 적이 없어 취미를 등산·음악감상·운동의 ‘3종 세트’로 대략 뭉뚱그리게 된 건 아닐까.

 취미가 등산이라고 말씀하시는 우리 아버지는 등산 계획이 잡히면 막걸리부터 챙기신다. 냉동실에서 꽝꽝 얼린 막걸리를 꺼내실 때의 표정은 행복 그 자체다. 보는 사람도 즐거워질 정도다. 아버지의 취미는 정확히 말하면 등산이 아니라 ‘땀 흘린 후의 음주’라고 하는 건 어떨는지. 그럼 이제 사위와의 탁구 한 판에서도, 딸과의 집안 대청소에서도 취미가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실 수 있지 않을까.

 늦었지만 나도 진짜 취미를 찾아보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그간 산을 오르는 것보다는 남편과의 가벼운 걸음이 좋았고, 산 입구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나누는 농담 섞인 대화가 좋았다. 그럼 나는… 어느 노래 제목처럼 ‘취미는 사랑’이라고 붙여야 하려나.

김혜미 JTBC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