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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A 포커스] 빗발치는 포화도 사랑은 못말려 … 전쟁 통서 혼인신고 마치고 아들 낳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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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1967년 영화 ‘조샤’의 한 장면. 이 전쟁에서 해방된 폴란드의 시골 마을에서 소녀 조샤가 러시아 군인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리아 노보스티]

1941~45년 전쟁은 소련에서 남성 1950만 명, 여성 60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남녀의 균형이 무너지고 전쟁의 파괴적 영향 때문에 결혼도 줄고 출산율도 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 끔찍한 시절에도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1941년 6월 22일 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그때 다 그러듯이 우리는 모스크바 시내를 밤새 돌아다녔지요.” 88세로 사망한 모스크바 시민 라리사 주보바가 회상록에 남긴 그때 모스크바는 평화로웠다.

그러나 평화는 그날 밤 끝났다. 라리사는 아침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정류장에서 전쟁이 시작됐다는 말을 들었다.

1941년 6월 23일 23~36세 남성에게 동원령이 내려졌다. 두 달 뒤 8월에는 18~51세 남성이 소집됐다. 소집 연령은 곧 17세까지 내려갔다. 남성들은 군에 자원했고 거기서 국민 의용군이 조직됐다. 전국의 여성과 아동, 노인들을 소개하는 작업이 개시됐다.

정확하게 한 달 뒤 모스크바에 폭격이 시작됐다. 라리사는 어머니와 함께 타슈켄트로 소개됐고 모스크바는 폐쇄됐다. 라리사는 연구소 일자리를 얻었다. 그렇게 두 해를 살다 1943년 그녀와 어머니는 모스크바로 돌아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모스크바에서는 현관 경비가 그들을 맞았다. 라리사는 공장에 나가 일하기 시작했다. 먼 친척이 라리사에게 부모 잃은 아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운명은 그렇게 되나 보다. 라리사는 그 아이가 사는 공동주택에서 사랑을 만났다.

“어느 날 부엌에 나갔다가(공동주택은 대개 아파트인데 층마다 부엌이 하나 있다) 여기서 미래의 남편 눈에 들었던 거예요. 남편도 이 공동주택에서 어머니, 누이와 함께 방 두 개에서 살고 있었거든요. 그이는 나를 쳐다 보더니 곧바로 이러는 거예요. ‘지금 쿠이비셰프로 떠나지만 돌아온다. 그때 결혼하자’.”

항공기 공장 설계사 빅토르 주보프는 약속을 지켰다. 1944년 4월 18일 두 사람은 공식 부부로 등록했다. “전쟁 중이어서 신고서를 미리 낼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가서 등록했어요. 혼인 등록소는 지저분한 지하실에 있었는데, 증명서 종이도 엉망으로 나빴어요. 그래서 1년 뒤엔 바꿔야 했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그건 사소한 일이에요. 중요한 건 우리가 행복했다는 사실이었어요.”

1941년 소련 인구는 1억9540만 명이었다. 러시아연방 통계청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 1946년 소련 인구는 2억990만 명이었다. 하지만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 1946년까지 소련 인구는 1억7050만 명으로 줄었다. 2550만 명이 생명을 잃은 것이다. 노동 가능한 연령대의 남자들이 최대 피해자였는데 남성 사망자가 1950만 명이다.

“성비 불균형이 너무 심해 전쟁 초기에 사람들은 가정을 꾸릴 생각조차 못했다. 게다가 끔찍한 폭격과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 소개, 기근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심리학자 옐레나 갈리츠카야는 말한다.

모스크바 혼인 등록소 관리국 자료에 따르면 1941년 모스크바의 혼인 등록은 약 4만4000건이었지만 전쟁 1년 뒤인 42년 등록 건수는 1만2500건으로 급락한다. 그러다 43년 1만7500건, 44년 3만3000건이 됐다. 전후 첫 해인 45년 혼인 건수는 8만5000건으로 치솟았다.

“이런 변화를 설명하는 게 어렵지는 않다. 전쟁 초기에 사람들은 전쟁이 오래가지 않길 바라면서 견뎠지만 1~2년 뒤에는 전쟁이 빨리 끝날 것 같지 않으니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뀐 것이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 살 수만은 없으며 그래서 심지어 전쟁 중이라도 사랑에 빠지고 싶어 한다”고 갈리츠카야는 말했다.

그 고통스러운 굶주림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45년 1월 라리사와 주보프 부부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5월에는 전쟁도 끝났다.

“우린 아이를 굉장히 갖고 싶어 했어요. 무서웠지만 전쟁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아기 갖는 걸 미루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우리는 젊었고 사랑에 빠져 있었죠.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 세대가 어떻게 그런 난리 통에 아기 낳을 생각을 다 했을까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당시 그건 자연스러운 생각이었어요. 우리는 그저 평범한 인간적 행복을 간절히 원했을 뿐이예요.”

전쟁 1년 전 모스크바의 신생아는 11만 명이었다가 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신생아 수는 70% 이상 감소했다. 물론 1946년 신생아 수는 급증했다. 남자들이 전쟁에서 돌아오고 평화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해 태어난 10만2000명의 신생아는 삶이 정상을 찾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리야 페도리시나

본 기사는 [러시스카야 가제타(Rossyskaya Gazeta), 러시아]가 제작·발간합니다. 중앙일보는 배포만 담당합니다. 따라서 이 기사의 내용에 대한 모든 책임은 [러시스카야 가제타]에 있습니다.

또한 Russia포커스 웹사이트(http://russiafocus.co.kr)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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