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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모르고 자라는 한·일 청년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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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채인택
논설위원

얼어붙은 한·일 관계에 봄을 부르는 제비가 보인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3일 일본 도쿄에서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을 만나 제6차 한·일 재무장관회의를 연 것이 신호탄이다. 연례회담이 2년 반 만에 재개됐다. 짧지 않은 경색의 시간이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23~24일 필리핀 보라카이에서 열린 제21차 아시아·태평양 경제공동체(APEC) 통상장관회의에 참석해 미야자와 요이치 일본 경제산업상과 통상장관회담을 했다. 2년1개월 만이란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과 29~31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제12차 아시아 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서 국방회담을 열 예정이다. 한·일은 이제 과거사와 현안을 분리하고, 경제·국방 등 실무 분야를 중심으로 대화를 본격 재개한 모양새다.

 하지만 이는 정부 간 관계 회복일 뿐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민간에선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한·일 학생 교류를 주도해온 한 교육계 인사는 “관계 냉각에 따라 양국 간 수학여행이 상당히 끊긴 상황이며, 이에 따라 학생교류나 민박체험도 씨가 말라 가는 상황”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정부끼리야 필요에 따라 만나고 협력을 재개할 수 있겠지만 정작 문제는 한·일 민간인 사이의 상호 오해와 감정 싸움”이라는 것이다. 일본 산케이신문과 후지뉴스네트워크(FNN)가 지난 23∼24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강제 징용된 한반도 출신자들이 일한 23개 메이지 산업 시설의 세계유산 등록에 한국이 반대하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해할 수 없다’는 응답이 73%, ‘이해할 수 있다’는 응답이 19.3%로 나온 것도 일본의 냉랭한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문제는 한 줄기 물을 사이에 두고 있는 한·일의 관계가 언제까지 냄비처럼 차가워졌다가 뜨거워졌다를 반복해야 하는가다. 질그릇처럼 온기가 오래가는 방안을 찾아봐야 한다. 방법의 하나로 교육을 들 수 있다. 이미 유럽에서 성공하고 있는 방식이다. 유럽위원회(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라고도 함)는 오래 전부터 대학생 교환학생 프로그램인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1987년 시작해 이미 300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 1년짜리 장기 교환 장학생 프로그램 참가자만 23만 명에 이른다. 30만 명의 고등교육기관 교직원과 행정직원에게도 교환 연수의 기회를 제공했다. 33개국 4000여 명의 교육단체 요원들도 기회를 얻었다. 이런 인적 교류가 바탕이 돼 정부 간의 관계를 넘어선 각국 국민 간의 끈끈한 민간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는 것이 유럽이다.

 유럽위원회는 2007~2013년 공동 평생교육사업에 70억 유로(약 8조4400억원)를 들였다. 학생과 교직원의 상호교환·방문학업·네트워킹 활동을 위한 예산이다. 교류로 상호이해가 증진되자 지난해부터 2020년까지 ‘에라스무스 플러스’는 프로그램을 새롭게 가동하고 있다. 7년간 147억 유로(약 17조7200억원)를 투입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초·중·고 학생과 교사 교류를 위한 코메니우스 프로그램, 대학 학생과 교수 교류를 위한 에라스무스 프로그램, 실업·교육 훈련을 위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프로그램, 성인 교육을 위한 그룬트비 프로그램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교류·협력 프로그램이 함께 가동 중이다. 상호이해 강화와 교육통합을 위한 ‘장 모네 활동’도 벌이고 있다. 거의 모든 연령의 학생과 교원이 다른 나라를 찾아 상호이해의 수준을 높이고 있다. 교육을 통해 국가 간 갈등을 사전에 줄이는 미래형 투자다.

 한·일 관계는 역사·정체성 문제로 갈등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소통과 대화가 있는 갈등과 없는 갈등은 독성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교육 차이로 인해 서로 상대를 모르는 채 살아온 것이 큰 원인일 수 있다. 서로 다른 내용의 교과서로 배우는 청년 세대의 갈등은 더욱 심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교육 교류를 강화하는 ‘한·일판 에라스무스 종합 프로그램’을 마련해 장기 가동할 필요가 있다. 그게 한·일 갈등으로 인한 비용을 줄이는 지름길일 것이다. 지난 2년여 양국 갈등으로 인한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통계로 나타낼 수 없는 감정적인 피해는 더하지 않겠나. 이제 그 고리를 끊자.

채인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