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내시 균형’과 연금 개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이정재
논설위원

천재 수학자, 30년간 정신분열증, 노벨상 수상, 이혼 그리고 38년 만의 재혼….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실제 주인공인 존 내시가 지난 23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아벨상 수상 후 귀갓길, 아내와 함께였다. 인생의 또 다른 절정의 순간, 생을 마감한 것이다. 영화보다도 극적인 삶이다.

 내시의 ‘내시 균형(Nash Equilibrium)’을 학계에선 ‘경제학을 바꾼 역사적 사건’으로 꼽는다. 경제학자 로저 마이어슨은 내시의 비협조 게임 이론을 “생명과학의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과 견줄 업적”이라고 했다. 내시 이후 ‘게임이론’은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치킨게임, 승자의 저주, 죄수의 딜레마가 모두 게임 이론에서 나왔다.

 누가 게임이론을 발명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혹자는 그 공을 서기 200년께 유대인의 『탈무드』에 돌리기도 한다. ‘죽은 사람의 재산이 그가 남긴 빚보다 훨씬 적을 경우 화가 난 채권자들이 그의 재산을 나눠 갖는 법, 한 사람은 옷 한 벌이 다 자기 것이라고 우기고 다른 한 사람은 절반이 자기 것이라고 우길 때 그 옷을 나눠 갖는 법.’ 이런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들이 바로 원시적 게임이론이란 것이다. “아이를 나눠 가지라”는 판결로 친모를 찾아준 솔로몬의 지혜도 넓게 보면 게임이론일 수 있다.

 ‘내시 균형’은 아주 단순화하면 양쪽 다 전략을 바꿀 이유가 없는 ‘최적의 상태’를 가리킨다. 상대의 전략에 따라 최선의 선택을 했으니 한쪽이 전략을 바꾸면 다른 쪽도 바꿔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최적’이 늘 최선일 수는 없다. 하지만 내시 균형은 모두 잃는 제로섬이 아니라 얼마가 됐든 모두 따는 윈윈 게임을 지향한다. 경제학자 로버트 웨버가 “내시 균형이란 모든 사람이 멍청한 짓을 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행동할 경우 볼 수 있는 세상의 모습”이라고 말한 이유다. 내시 균형이 그렇다고 경제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정치·외교는 물론 실생활에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내시 균형의 틀 속에 한창 달궈진 이슈 하나를 넣어보자. 공무원연금 개혁이 적절할 것이다. 여당은 최근 야당이 요구한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 명기’를 받아들였다. 야당은 대신 ‘검증한 뒤 논의한다’란 문구를 넣자는 여당 제안을 수용했다. ‘언급하되 확약하지 않는’ 최적의 선택을 한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시 균형이다. 그런데 야당은 한 걸음 더 나갔다. 연금 개혁 합의 조건으로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 사퇴와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개정을 추가로 요구했다. 안 들어주면 기왕 합의한 법률안 처리도 거부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먼저 판을 깬 게 여당이고 청와대요, 소득대체율 50%도 야당이 일부 양보한 만큼 대가를 지불하라는 건데 문제는 본질이 아닌 ‘별건’을 요구했다는 거다.

 야당의 주장은 내시 균형을 깨자는 소리와 같다. 애초 ‘50%’라는 엉뚱한 숫자 때문에 국민이 분노한 게 얼마 전이다. 공무원연금 개혁하랬더니 애꿎은 국민연금을 건드린 게 누군가. 그런데도 국민은 이번 개혁안을 용인했다. 심히 마땅찮지만 그나마 안 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깨졌던 내시 균형이 가까스로 복원된 건 다 국민의 힘이란 얘기다. 그런데도 야당이 마지막까지 딴소리를 해서야 되겠나. 이쯤에서 물러서는 게 옳다. 더 나가면 내시 균형이 아니라 치킨게임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데프콘2를 발동해 흐루쇼프 서기장을 압박했다. 3주간 빨간색 버튼(핵 미사일 발사)에서 손가락을 떼지 않고 버틴 ‘벼랑 끝 전술’로 흐루쇼프를 물러서게 했다. 야당이 바라는 게 이런 치킨게임인가. 경제학자 토머스 셸링은 게임이론이 인생과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절대적인 ‘최고’의 선택이란 없다. 결과는 늘 상대가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내시는 21살 대학원생이던 1950년 세상의 이런 이치를 수학으로 증명했다. 경제는 정치요, 게임이다. 60년 전 내시가 본 걸 오늘의 대한민국 정치는 왜 아직도 못 보고 있는 걸까.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