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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이하경 칼럼

분단 70년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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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하경
논설주간

신의주의 곡창 황금평 들녘이 철제 펜스 너머로 한눈에 들어왔다. 중국 인부들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정문을 들락거렸다. 황금평은 압록강 하구의 북한령 섬이었지만 오랜 퇴적으로 중국 단둥 쪽에 붙어 육지가 됐다. 북한과 중국이 경제특구로 공동개발하기로 하고 2011년 6월 착공식을 했다. 남한 사람에게는 금단(禁斷)의 대지였고, 나는 단 한 뼘의 땅에도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다. 분단 70년, 남북의 단절은 북·중 국경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잊혔던 군복무 시절의 기억이 기지개를 켜고 깨어난다. 우리는 인간 올빼미였다. 낮엔 자고 밤이면 M16 소총과 수백 발의 실탄, 방탄복으로 완전무장해 남방한계선을 넘어 갔다.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없는 비무장지대가 기다렸다. 대인지뢰가 깔린 산과 들을 수색한 뒤 잠복해 밤새도록 적의 출몰을 경계했다. 

 추위와 공포가 공존하면 시간은 천천히 흘러간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눈밭을 헤매는 노루의 처연한 울음소리가 쏟아지는 별빛 사이로 모였다 흩어졌다. 그래도 개성에서 첫 기차가 경적을 토해내면 새벽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우리는 반쯤 얼어 무거워진 몸으로 귀대했다. 하루 몇 백원의 생명수당을 모은 돈으로 산 쓴 소주를 시린 가슴에 털어 넣으면서 청춘을 소모했다. 뒤바뀐 밤낮처럼 분노와 무력감이 뒤범벅이 된 일상이었다.

 가슴 뛰는 20대 초반의 자유를 유예시켰던 분단체제는 지금도 남과 북의 운명을 빈틈없이 지배하고 있다. 어렵게 이뤄낸 산업화·민주화·정보화도 분단과 냉전이라는 치명적 한계 앞에서는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불안한 성취일 뿐이다. 분단의 비극성은 한국의 정치와 심리를 끝없이 분열하게 만드는 뿌리라는 사실에 있다.

 북한은 남쪽과 북쪽에 모두 경계선을 갖고 있다. 남으로는 휴전선, 북으로는 압록강·두만강이 만들어낸 중국·러시아와의 국경선이다. 휴전선의 경계는 삼엄하지만 북쪽으로의 경계는 느슨하다. 그래서 남쪽의 경계만 봉쇄할 수 있는 5·24 제재조치는 북한에 타격을 주지 못하고 우리 기업의 비즈니스 기회만 희생시켰다. 5·24 조치 이후 남북경협 중단으로 인한 직접 피해액은 145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중국은 북한과의 경제협력을 사실상 독점하고 접경지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황금평에서 압록강 상류 쪽으로 5㎞ 떨어진 곳에는 신의주와 단둥을 연결하는 3030m 길이의 왕복 4차로 신압록강대교가 들어섰다. 중국이 3700억원을 들여 완공했다. 신의주 쪽 연결도로 공사만 끝나면 바로 개통된다. 하루에 55t급 대형 화물차 3000대 이상이 통과해 북·중 물류의 80% 이상을 책임지는 경제 대동맥이 된다. 

 2013년 3차 핵실험과 장성택 처형 이후 소원해진 북·중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황금평은 개성을 능가하는 북한 최대의 경제특구가 되고, 신의주와 단둥은 사실상 하나의 도시가 될 것이다. 중국은 선양~단둥~신의주~평양~개성을 고속철도로 연결하고 싶어한다. 서울과 개성까지 연결되면 남북한과 중국이 단일 경제권이 되는 일도 꿈만은 아니다. 우리가 팔짱을 끼고 있는 동안 3국 경협의 주도권은 중국으로 넘어갔다.

 자신의 운명에 점점 깊숙이 개입하는 중국을 바라보는 북한의 속내는 복잡하다. 존 에버라드 전 북한 주재 영국대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 사람들이 ‘미국인보다 중국 사람이 더 싫다’는 얘기를 많이 해 놀랐다”고 했다. 황금평 개발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신압록강대교의 개통이 늦춰지고 있는 데는 북한의 중국 종속화에 대한 경계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한국이다. 그렇다면 남과 북은 더 늦기 전에 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눠야 하지 않을까.

  남북은 이미 개성공단이라는 놀라운 성공 사례를 만들어냈다. 2005년 이래 한국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근로규율과 근면성을 결합한 개성공단은 지난해 말까지 26억 달러가 넘는 제품을 생산했다. 교역액도 112억 달러에 이르렀다. 연평도와 천안함 사건이 터졌을 때도 멈추지 않은 평화와 신뢰의 상징이었다. 개성공단 모델이라면 남·북·중 3국 경제통합도 가능하다. 

 북핵 문제도 우리가 주도권을 행사해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해야 대화할 수 있다고 할 게 아니라 핵을 포기할 조건부터 만들어야 한다. 5·24 조치의 부분적 해제, 금강산관광 재개가 바람직하다. 북한과 대화하고 미국을 설득해 궁극적으로는 북·미 수교(修交)의 길을 열어야 한다.

  분단체제가 두 세대를 넘어 70년간 계속되고 있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이젠 어떤 성취도 삼켜버리는 블랙홀에서 벗어나야 한다. 평화와 협력의 길로 가기 위해 남북의 지도자가 특사교환이든 정상회담이든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이하경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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