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풍 담긴 창의적 요리 … 미슐랭도 평가 기준 바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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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딱 1년 전 20석 규모의 예약제 레스토랑 문을 열었다. 주인이 따로 있는 레스토랑의 고용 셰프에서 스스로 모든 걸 책임지는 오너 셰프가 된 지 6개월쯤 지난 지난해말, 국내 외식 시장의 현실을 뼈저리게 경험하며 점점 더 큰 부담을 느껴가고 있었다. '과연 이런 부담을 견뎌가며 오너 셰프로 평생 살아 갈 수 있을까.' 매일매일 스스로를 향한 의문이 커져만 갔다. 마음을 다잡을 뭔가 새로운 전기가 필요하던 상황에서 떠오른 건 프랑스 파리 라스트렁스( L’Astrace)의 오너 셰프 파스칼 바르보(Pascal Barbot)였다. 그는 사실 레스토랑을 처음 준비할 때부터 롤모델로 생각해왔던 사람이다.

2000년 문을 연 라스트렁스는 미식의 천국 파리에서도 딱 10개뿐인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중 하나다. 라스트렁스가 생기자마자 전세계 미식가들은 아시안 터치가 가미된 파스칼 셰프만의 창의적인 요리에 열광했다. 그의 소박한 레스토랑은 럭셔리한 인테리어와 완벽한 설비가 최고 레스토랑의 필수 조건이 아님을 훌륭하게 증명해 보이기도 했다. 또 프랑스의 젊은 요리사들에게는 네오 비스트로라는 장르를 개척해 보임으로써 새 가능성을 열어준 대상이기도 했다. 네오 비스트로란 비스트로(선술집) 같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정통에서 살짝 벗어난 퓨전 요리를 선보이는 새로운 다이닝 장르를 말한다. 기존 파인 다이닝(고급 요리)의 격식을 걷어내는 대신 셰프와 레스토랑의 개성에 초점을 맞춰 점점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

바르보가 이렇게 틀을 깨는 요리를 선보일 수 있었던 건 그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프랑스의 소도시 오베르뉴(Auvergne) 태어나 프랑스의 다른 많은 셰프들처럼 10대 시절부터 요리를 시작했다. 막심(Maxim’s)이나 트롸그로(Troisgros)등 프랑스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배웠고, 영국·호주 같은 영어권 국가에서부터 아시아와 남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식문화를 접하며 견문을 넓혔다.

물론 그의 요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역시 미슐랭 스타 셰프인 알랭 파사드(Alain Passard)다. 그의 레스토랑 라르페쥬(L’Arpege)에서 5년간 부주방장으로 일하며 재료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에 맞는 최상의 조리법 등 그가 라스트렁스에서 지금 펼치고 있는 요리철학을 굳건히 다졌다. 그리고 2000년 7월 운명의 파트너인 라스트렁스 홀 책임자 크리스토프 로햇(Christophe Rohat)을 만나 함께 라스트렁스 문을 열었다. 라스트렁스는 오픈 첫해 미슐랭 1스타를 획득하고 2005년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이어 2007년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이 됐다.

당시 프랑스 미식계가 발칵 뒤집혔다. 그때까지 최고 권위의 맛집 가이드북인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셋을 줬던 레스토랑에 비해 라스트렁스의 규모나 인테리어, 심지어 서비스 기준까지 모두 충족하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다들 결과에 수긍했다. 바르보만의 창의적인 음식이 콧대높은 미슐랭의 기준마저 바꿔 놓았다고 말이다. 과장이 아니다. 2007년 이후 지금까지 줄곧 별 셋을 유지하며 명실상부한 프랑스 대표 셰프로 자리매김했으니 말이다.

국내에 라스트렁스에서 스타지(무료 견습생)를 한 셰프가 여럿 있는 걸로 안다. 나는 라스트렁스 좀 다른 형식으로 바르보와 첫 인연을 맺었다. 바로 2013년 11월 벨기에에서 열린 '코리안 컬리너리 랩' 행사 때였다. 벨기에 주재 한국 대사관이 유럽의 스타 셰프와 저널리스트를 대상으로 한국 음식문화를 소개하는 행사였는데, 그는 초청받은 유럽 셰프, 나는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당시 그와 시간을 보내면서 명성에 비해 너무나 겸손하고 인간적인 면모에 반했다.

그때 인연으로 그는 나를 라스트렁스에 초대했는데, 그때의 경험은 지금 떠올려봐도 감동 그 자체다. 가정집을 개조한 레스토랑이라 그런지 그의 주방은 6~7평(20~23㎡) 남짓으로 정말 작았다. 아무리 작아도 필요한 조리기구는 다 있었고, 공간의 제약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짜임새 있게 활용했다. 주방 스태프 모두 정리정돈에 신경을 쓰는 게 보였다. 덕분에 냉장고는 물론 구석구석 잘 정리된 재료들이 효율을 높였다. 같은 공간이라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보여 주었다. 그간 경험한 다른 미슐랭 레스토랑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주방에서 이런 대단한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너무나 놀랐다. 그리고 호화로운 주방이 최고 레스토랑의 필수조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와의 첫 만남 이후로 그의 음식은 물론 그의 사람 됨됨이에 반해 그의 열혈 팬이 됐다. 기회가 된다면 손님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셰프로 꼭 그의 주방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리고 올 1월 그의 레스토랑에서 견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미 내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데 굳이 먼 파리에서 견습을 자청한 건 바르보가 나의 롤모델이었기 때문이다. 요리가 창의적이고 늘 변화하는 건 물론 셰프가 늘 레스토랑에 상주한다는 면에서 말이다.

두근두근. 견습 첫날인 1월의 어느날 새벽 3 시 30분, 바르보를 만나 유럽 최고의 식자재 도매시장인 파리 렁지스(Rungis) 시장으로 떠났다. 바르보가 모든 차에 나란히 앉아 함께 시장을 보러가다니, 꿈만 같았다. 바르보는 늘 헝지스에서 장을 보는데, 단골 거래처 위주로 능숙하게 재료를 구입했다. 아무리 단골집이라지만 모든 재료의 단가와 품질을 따져 꼼꼼하게 골랐다. 일부 단골집은 그를 위해 진열하지 않고 따로 보관한 걸 슬쩍 꺼내 주었다. 직접 차를 몰고 매번 식자재를 구입하러 가는 미슐랭 3스타 셰프는 전세계에 바르보뿐이 아닐까 싶다. 그날 5시간 가량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바르보야말로 정말 뼛속까지 요리 장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4일간 그의 주방에서 함께 요리를 만들며 꿈 같은 시간을 보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메뉴는 당일 오전 농장에서 온 생 푸아그라를 베르주(verjus·신 과즙)에 담그고, 크고 단단한 양송이 버섯을 손질해 얇게 밀어낸 뒤 프랑스 남부지역에서 나는 온갖 종류의 시트러스를 곁들여 내는 푸아그라 버섯 밀푀유(Mille Feuille, 프랑스어로 1000장의 나뭇잎이라는 뜻으로 패스추리·프렌치파이 등 여러 겹으로 된 음식)였다. 2004년부터 라스트렁스의 대표메뉴로 자리잡은 바로 그 음식이다.

해산물도 인상적이었다.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전역에서 최상품 해산물만 받아 간결하게 조리했다. 프랑스 식당이라 버터와 크림을 많이 사용할 거라는 편견과 달리 간단한 찜이나 구이로 모든 해산물을 다루었다.

서비스 내내 바르보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모든 주방 팀을 독촉했다. 정말 숨막히는 2시간의 서비스가 매일 밤 이어졌다. 전쟁터 같은 주방과는 상반되게 홀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모인 손님들이 행복하게 식사한다. 라스트렁스는 일주일에 4일만 영업하고 좌석도 겨우 26석뿐이라 점심 저녁 모두 최소 2~3개월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다.

바르보는 늘 이렇게 말했다. “나를 비롯해 라스트렁스 직원 모두 충분히 쉬고 개인적 시간을 보내며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또 그런 삶이 라스트렁스 음식과 서비스에 전달돼야 오래 지속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선택한 오너 셰프의 삶을 평생 지치지 않고 하고 싶다. ”

세계 최고로 칭송 받는 셰프의 원칙은 이렇게 소박하면서도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라스트렁스에서의 일주일은 내가 평생 요리하며 살 수 있는 힘을 주는 시간이었다. 문득 내 레스토랑도 라스트렁스처럼 누군가에게 닮고 싶은 공간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파스칼 바르보
현재 라스트렁스(미슐랭 3스타) 오너 셰프
알랭 파사드의 라르페주(L’Arpege) 부주방장
2000년 라스트렁스 오픈
2007년 미슐랭 3스타 획득 후 줄곧 유지

강민구(31)
현재 레스토랑 밍글스 오너 셰프
'노부'의 바하마 지점 최연소 총괄셰프
1984년 경기대 외식조리학과 졸업

강민구 밍글스 오너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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