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3)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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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는 즉시 대학에 가서 고목법문학부장을 찾았다. 부장이란 지금 우리나라의 경우로 치면 학장에 해당하는데 법과대학장과 문과대학장을 겸하고 있는 셈이었다. 고목부장은 일어·일문학선생으로 온후한 사람이었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신문기자가 네 적성에 맞느냐고 묻고 무슨 글을 쓴 것이 있으면 보이라고 하였다. 마침 부장실 서가에 영문학회보가 꽂혀있어 거기 실린 내 글을 보였다.
고목부장은 그것을 다 읽은 다음 사실은 내가 경성일보사장을 아는 터이니 오늘 그를 만나서 부탁할 것이니 내일 아침에 다시 부장실로 오라고 하였다. 경성일보사장은 조선총독의 고문격이어서 총독이 부임할 때 동경에서 거물을 데리고와 사장자리에 앉히고 여러 가지를 상의하게 되어 있었다. 그때 총독은 우원일성 육군대장이었는데, 이 사람은 그전에 재등총독이 제네바 군축회의대표로 갔을때 총독대리로 온 일이 있어 조선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정식으로 조선총독에 임명되었을 때 일본에서 경성일보사장을 데리고 오지않고 여기서 경기도지사를 하던 시실추수를 그 자리에 앉혔다. 조선사정에 자신이 있으므로 일본에서 고문을 데리고 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원은 매사에 이런 자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갔더니 고목부장은 채용할 것 같으니 같이 경성일보사로 가서 지배인을 만나자고 하였다.
부장 차를 같이 타고 경성일보사로 가서 아도지배인을 만났다. 지배인은 나한테 몇마디 물어보더니 좋다고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하였다.
고목부장은 월급이 얼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지배인은 규정에 따라서 70원이라고 하였다. 고목부장은 중학교교원이라도 1백20원인데 왜 그렇게 적으냐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것은 가봉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고 원래 봉급은 교원이 75원이라고 지배인이 대답하였다. 가봉이란 것은 일본사람이 식민지조선에 나왔기 때문에 더 받는 것으로 판임관은 6할, 고등관은 4할을 더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75원에 가봉6할을 더하면 1백20원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일본사람의 경우였다. 고목부장은 월급이 너무 적은데 다른데 영어시간강사라도 다니는 것을 허락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자기도 월급이 적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는 터이니 신문사근무에 지장이 없으면 허락하겠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것으로 나는 지배인의 승낙을 받았으므로 세브란스의전에 터놓고 영어강사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고목선생한테 미리 이야기한 것인데 일이 순조롭게 잘된 것이었다.
지배인은 그 자리에서 이익상편집국장을 불러 이 사람을 내일부터 학예부원으로 쓰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를 보고 편집국장을 따라가 지시를 받으라고 하였다.
그때 이 신문사에는 신문 셋이 발간되고 있었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보는 넓은 방의 오른쪽과 왼쪽을 쓰고 있었고 2층 작은 방에 영자신문 「서울 페레스」가 있었다. 영업국도 한방, 사진부도 한방이었다.
나는 2월부터 매일신보 학예부견습기자로 입사하였다.
편집국장은 아도지배인한테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성해 이익상은 키가 작고 얼굴이 늘 불그레하였는데 사람은 매우 호인인 것 같았다. 자기를 데리고 온 박석윤은 신문사를 떠났고 지배인과는 별 친분이 없어 공중에 떠있는 것 같았다.
학예부에는 그때 이미 김원주가 사직하고 나가버려 삽화를 그리는 행인 이승만이 혼자 있었다. 나는 처음날부터 한 면을 맡아서 기사를 만들고 판을 짜고 사진을 골라 내보내는 등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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