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과「우아함」…양도의 명장「누레예프」와 비엔나 국립오페라단|최정호<연세대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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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누레예프」를 처음 본 것이 1965년-그가 레닌그라드 킬로프 발레단을 뛰쳐나와 서방으로 망명한지 4년째 되던 해였다.
그의 망명은 당시 전유럽의 센세이션이었다.
그의 서방세계에의 탈출로 해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것은 물론 「누레예프」자신이오,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영국 로열 발레의 「마고트·폰테인」이었다.
그 무렵 「폰테인」은 그녀의 오랜 춤의 파트너였던「마이켈·솜스」가 물러 남으로해서 말하자면 짝을 잃은 「무대위의 과부」 가 될뻔해 있었다.
그때 「폰테인」 은 혜성처럼 나타난 19세 연하의 기린아 「누레예프」를 맞아 현대 발레의「꿈의 콤비」 라 일컫는 「폰티인」-「누레예프」 의 새 기원을 열고 그럼으로해서 로열발레의 영광과 명성에도 새 역사의 막은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시드니의 오스트레일리아 발레단이 이 「폰테인」과 「누레예프」 를 초빙하여 유럽대륙을 순회공연할때 베를린에서 3막의 로맨틱 발레 『라이몬다』 를 본 것이 나의 「누레예프」 체험의 시작이었다.
벌써20년전의 일이다.
유럽에서의 발레의 역사는 「화니·체리토」「화니·에슬러」「마리· 말리오니」 등의 전설적인 무희가 로맨틱 발레에 군림했던 19세기를 여성무용이 절대권을 확립했던 시대로 기억하고 있다.
그에 대해서 우리들의 20세기는 남성무용의 르네상스로서 막을 열었고 거기에 절대 기여를 한것이 다름아닌 「디아길레프」「니진스키」 등의 러시아 발레였다.
그리고 그 전통을 지금도 모스크바의 볼쇼이 발레와 레닌그라드의 킬로프 발레가 지키고 있다.
「누레예프」 는 바로 이러한 러시아발레의 전통속에서 나온 정통의 적자다.
그의 춤을 보고 있노라면 「누레예프」 는 하늘을 나는듯 후련한 「도약의 춤」 과 사람의 숨을 죽이게 하는 우아한 「아다지오의 춤」 을 다같이 자유자재로 추워대는 「힘」 과 「엘레강스」의 양도의 비추오소-.
가수로 말하자면 「헬덴·테노어」 (웅장한 목소리) 와 「리릭·테노어」 (서정적 목소리) 를 겸비한 명장같기만 하다.
그러나 「누레예프」 는 단순한 무대위의 프리모 발레리너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동시에 무대뒤에서 발레를 안무하는 빼어난 당대의 안무가이자 연출가이기도하다.
40대의 젊은나이로 이미 생전에 브로크하우스대사전에 이름이 오른「누레예프」는 특히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의 연출을 통해 고전발레에 새로운 심미적인 기준을 제시한 안무가로서도 기록되고 있다.
바로 이 「누레예프」 가 안무한 『백조의 호수』 를 나는 같은해 1965년의 비엔나 페스티벌에 가서 비엔나 국립오페라발레의 공연으로 구경하였다.
이래 비엔나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유럽도시가 되었고 그뒤 10여차레 오스트리아를 방문할때마다 나는 비엔나 오페라발레 백년제를 포함해 거의 언제나 이 발레라의 공연을 구경해왔다.
이번에 서울에 같이 오는 「수잔나·키른바워」와 「릴리·쇼이어만」이 지금은 결혼한 부인이 되어 제2선에 물러나 있으나 60, 70년대 당시엔 제1솔리스트로서 「누레예프」의 파트너가 되어 춤추고 있었다.
이제 나와 같이 나이먹어가는이 옛 비엔나 여인을 서울에서 재회한다는것도 흐뭇한 반가움이 아닐 수 없다 (덧붙여 소개하면 재작년에 나는 뮌헨에 머무르면서 「수잔나·키른바워」 가 기획하고 직접 출연해서 전 유럽에 방영된 10여 차례에 걸친 TV 연속 프로 『춤- 움직임이 전부다』 를 시청하여 발레교사로서의 그녀의 활약도 보게 되었다).
한편 이번에 「누레예프」의 파트너로 「오로라」 공주역을 추는「에바·에브도키모바」는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 발레에서 초빙해온 객원프리마.
나는 1977년 짧은 독일 여행중 우연히도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에 들러 그녀가 신예의 프리마로서 「스트라빈서키」 의 『페트루시카』 와 『아곤』을 추는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녀를 또 7년만에 다시보게 된다는것도 기쁜일이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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