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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경민의 시시각각

2500조 시한폭탄 될 국민연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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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경민
정경민 기자 중앙일보
정경민
경제부장

정치권의 물타기 신공(神功)이 득도의 경지다. 공무원연금을 수술하겠다더니 정작 배가 갈린 채 드러누운 건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50%’라는 연막탄 속에 공무원연금은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월급 100만원을 받아온 사람에게 훗날 연금으로 40만원이 아니라 50만원을 주겠다는데 마다할 사람은 없다. 더욱이 야당은 지금 내야 할 보험료도 1%포인트만 올리면 된다고 속삭인다. 그러나 이 사탕발림엔 치명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동안 쌓아온 국민연금 기금을 2060년까지 다 까먹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 다음부턴 유럽처럼 당대 사람들로부터 세금처럼 국민연금을 거둬 노인을 부양하면 된다고 한다. 과연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간단한 일일까.

 국민연금 기금은 올해 500조원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현 추세라면 28년 후인 2043년엔 2561조원으로 불어난다. 그런데 덜 내고 더 받는 현행 방식을 고수하면 기금은 17년 만인 2060년에 바닥난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냐고? 1500조원이면 국내 증시 주식을 몽땅 사고도 남는다. 국내 채권을 싹쓸이하는 데도 1650조원이면 족하다. 국내 금융시장이 5배 이상 커지지 않는 한 국민연금은 앞으로 28년 동안 주식·채권·부동산을 닥치는 대로 빨아들일 ‘블랙홀’이 될 거란 얘기다. 그러다 2044년부턴 거꾸로 17년 대홍수가 닥친다. 국민연금이 노령연금을 지급하자면 보유 자산을 팔아야 한다. 국민연금이 한껏 빨아들인 주식·채권·부동산을 한꺼번에 토해내면 시장은 초토화된다.

 상상조차 끔찍한 대재앙을 피할 길은 외통수다. 기금 고갈 시기를 최대한 늦춰 충격을 분산시켜야 한다. 야당 주장대로 찔끔 더 내고 왕창 더 받는 방식으로 바꾸면 기금 고갈 시기만 앞당겨 재앙을 재촉할 뿐이다. 도깨비방망이라도 떨어지면 모를까 재앙을 피하자면 지금보다 더 내고 덜 받는 길밖엔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솟아날 구멍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앞으로 28년 동안은 기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우리로선 다시는 접하지 못할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다. 이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고 돈을 잘 굴려야 한다. 운용수익률을 1%포인트만 높여도 기금 고갈을 5년은 늦출 수 있다.

 한데 현재 국민연금의 운용 체계는 기금이 30조원이었던 1998년 그대로다. 동네 구멍가게나 돌보던 촌로에게 삼성전자 경영을 맡기고 있는 격이다. 기금을 어디다 어떻게 굴릴지 방향을 정하는 기구는 20명으로 구성된 기금운용위원회다. 그런데 위원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이고 나머지 19명도 돈 굴리는 데는 비전문가들이다. 기금운용위 회의록만 봐도 그렇다. ‘환헤지’나 ‘공매도’ 같은 가장 기초적인 용어조차 몰라 회의가 겉돌기 일쑤다. 물론 기금운용위 뒤엔 150여 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기금운용본부가 있다. 그러나 이 본부조차 내년 하반기 전북 전주로의 이전을 앞두고 있다. 민간보다 턱없이 적은 연봉에 지방 근무까지 하라면 붙어 있을 전문 인력이 몇이나 될까.

 게다가 기금 수익률을 높이는 건 갈수록 어려워진다. 88년 이후 국민연금의 누적수익률은 5.9%다. 그나마 두 자릿수 금리와 부동산 불패신화가 살아 있었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성적이다. 1~2%대 초저금리 시대에 지금처럼 국내 채권만 편식해선 5% 수익률도 언감생심이다. 주식이나 부동산처럼 고위험·고수익 투자 비중을 높일 수밖에 없다. 기금 덩치가 500조원을 넘으면 싫어도 해외로 나가야 한다. 국내엔 국민연금이 퍼 담을 주식·채권이 충분치도 않겠거니와 훗날 돈 뺄 때 재앙을 자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나 국회도 심각성을 모르는 바 아니다. 기금운용본부를 국민연금에서 떼어내 공사(公社)로 독립시키자는 안도 이미 나와 있다.

 그러나 ‘소득대체율 50%’란 덫에 걸려 기금 운용 체계 개혁은 실종됐다. 복지부는 애초 22일로 잡았던 정책토론회조차 슬그머니 미뤘다. 그 사이에도 2500조원 시한폭탄의 시계 바늘은 쉬지 않고 돌고 있다. 정부나 국회는 정녕 폭탄이 터져야 정신 차릴 건가.

정경민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