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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현영철 숙청은 99% 사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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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논설실장

미국에 퓰리처상이 있다면 우리나라엔 ‘한국기자상’이 있다. 첫 테이프는 1967년 TBC 김집 기자의 ‘간첩 이수근 판문점 탈출사건’이 끊었다. 전날 숙취로 판문점 화장실에서 잠에 곯아떨어진 그는 다른 기자들이 버스로 귀경한 것도 몰랐다. 무차별 총소리에 깨어보니 북한 경비병들의 사격을 뚫고 북조선중앙통신의 이수근 부사장이 남한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다른 언론사들은 김집이 현장에서 생중계하는 걸 넋 놓고 지켜봤다. 이후에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87년) 등 굵직굵직한 특종이 이 상을 탔다.

 95년부터 ‘한국기자상 대상(大賞)’이 신설됐다. 매년 주는 게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한 특종에만 준다. 덩샤오핑 사망(97년), 김정일·장쩌민 극비 베이징 회담(2000년), 국정원 대선 여론공작(2013년) 등이 영예를 안았다. 그중 가장 복잡한 사연은 무려 9년 만에 대상을 탄 2010년 연합뉴스의 ‘북한 김정일 후계자 3남 김정은’이었다. 주인공인 최선영 기자는 96년 북한 3등 서기관인 남편 현성일씨와 함께 잠비아에서 망명한 탈북자 출신. 2009년 1월 송고된 이 기사는 2년여간 ‘확인 불가능’을 이유로 수상이 보류되는 곡절을 겪었다.

  국가정보원에 이 특종 보도는 흑역사다. 뼈 아프게 물 먹었다. 오죽하면 국정원이 최 기자의 대북 용의점까지 의심했을까. 2009년에는 탈북자 인터넷 매체가 북한 화폐개혁을 가장 먼저 공개했다. 망신살이 뻗친 국정원은 발 빠르게 변신했다. 북한 ‘첩보’를 대통령에게 보고한 뒤 ‘정보’ 수준이 되면 서둘러 공개했다. 2013년 장성택 숙청이 대표적 사례다. 국정원은 그의 측근이 처형되고 신변이상이 감지되자 12월 3일 급히 휴대전화로 “실각 징후 농후”라며 국회 정보위에 보고했다. 북한은 실제 9일 뒤 장성택을 처형했다.

 지난 13일 국정원의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처형설’을 놓고도 말이 많다. 북한은 ‘악취 풍기는 악담질’이라 비난하고, 일부 외신은 “여전히 북한 TV에 녹화영상이 나온다”며 의혹을 제기한다. 국내의 진보 인터넷 매체들도 덩달아 ‘국정원 음모론’을 부채질한다. 그래서 복수의 국정원 고위 관계자에게 물어보았다.

 -처형을 확신하는가?

 “99% 사실이다. 그가 숙청되지 않았다면 국정원이 문을 닫아야 한다.”

 -어떻게 알았는가.

 “4월 30일 처형 직후 감지했다. 김정은의 숙청이 빈발하면서 강건종합군관학교 사격장은 우리 테킨트(인공위성을 활용한 기술 정보)의 관심 지역이다.”

 -언론에 나온 위성사진은 흐릿한데.

 “그건 저해상도 상업용 위성 사진이다. 우리 사진은 훨씬 정밀하다. 처형 규모와 방식, 이동 경로를 충분히 알 수 있다.”

 -현영철로 특정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물론 처형 대상자의 얼굴까지 식별할 수는 없다. 사람을 통해 수집하는 휴민트(인적 정보)와 감청을 통한 시긴트(통신 정보)로 교차 확인과정을 거쳤다.”

 -지난 13일 전격 공개한 이유는.

 “그 며칠 전부터 숙청 소문이 빠르게 나도는 조짐이 보였다. 국내외 언론에 나오기 전에 공개하자는 쪽으로 판단이 섰다. 하루 전에 CNN의 김경희 독살설 등 북한 정보의 혼선도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대통령이 공개를 지시했나”라는 질문에 이들은 “대답할 위치에 있지 않다”며 침묵했다.)

 -북한 영상에 현영철이 계속 나오는데.

 “드문 사례가 아니다. 숙청 후 영상을 곧바로 지운 장성택 케이스가 예외적이다. 참고로 최근 그의 공개 군활동 장면은 전혀 없다. 왜 흔적을 지우지 않는지 북측 의도를 분석 중이다.”

 현영철 처형의 진실은 시간이 지나봐야 알 듯싶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국내 2만7000명의 탈북자들과 북쪽 친인척들의 휴대전화 통화도 드문 일이 아니다. 북한이 슬슬 내부 강연회에서 숙청 사실을 언급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물론 숙청을 믿든 안 믿든 그건 자유다. 하지만 근거 없는 음모론에 빠지지 않는 쪽이 정신건강에는 좋을 듯싶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