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M] 수남은 남편밖에 몰라요-‘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이정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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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이정현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화제작은 안국진 감독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였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영화제작 연구과정으로 만들어져 이번 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거머쥐었다. 잔혹 동화를 연상시키면서도 우리네 삶의 부조리함을 예리하게 짚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의 히로인은 주인공 수남을 연기한 배우 이정현(35)이었다. 수남은 불의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위해 미친 듯이 일한다. 명함 돌리기, 신문 배달, 청소 등 온갖 잡일을 척척 해낸다. 하지만 수남이 집을 산 동네에 재개발 계획이 발표되자 상황은 더 악화된다. 성실하게 삶을 이어 나가지만, 불행의 나락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그녀. 이정현은 수남의 멍한 눈빛부터 어눌한 말투까지 생생히 살려냈다.

이정현은 박찬욱 감독의 추천으로 영화의 시나리오를 접했다. 그는 시나리오를 한 시간 만에 읽고 곧바로 출연을 결정했다. 그는 “스릴러에 블랙 코미디가 적절히 가미돼 무척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독립영화라는 이유로 회사가 내게 말도 안 하고 거절한 시나리오였더라. 나는 영화가 흥미롭다면 독립영화, 상업영화 가리지 않는데 말이다.”

현장에서 이정현은 동갑내기인 안 감독과 긴 대화를 나누며 수남이 겪는 모든 상황을 꼼꼼히 짚었다. 어딘가 덜 떨어져 보이는 수남의 말투도, 그가 추운 겨울에 목이 파인 후줄근한 스웨터를 입는 것도 이정현의 아이디어다. “수남은 남편밖에 모른다. 정신 연령은 10대 정도에 머물러 있다. 만화 같은 캐릭터를 현실적으로 그리고 싶었다.” 이정현의 말이다. 그는 수남이 어떤 과정을 겪고 이 상황까지 왔는지 이해하는 데 주력했다. 손재주가 남다른 수남이 잡일을 ‘달인’처럼 해내는 장면을 위해 오랜 공을 들였다. “겉으로 보기에 괜찮은 정도로 연기해선 안 된다. 캐릭터를 깊이 파고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정현은 영화 현장 구석구석에 큰 애정을 보였다. 이 영화를 찍으며 감독과 친구처럼 지냈고, 자비로 스태프의 간식을 샀다. 촬영에 사용된 카메라 장비 이름도 줄줄 읊을 정도다. “좋은 현장에서 훌륭한 스태프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많이 배운다.” 폭넓은 캐릭터에 대한 욕심도 크다. 평면적으로 비춰지는 캐릭터는 꺼려진단다. 그는 “많은 여배우들이 그렇겠지만, 박찬욱·봉준호 감독 작품의 여성 캐릭터처럼 독특하고 흥미로운 배역을 맡고 싶다”며 “‘차이나타운’(4월 29일 개봉, 한준희 감독)처럼 입체적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여자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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