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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만에 … 강기훈 ‘유서대필’ 무죄 확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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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014년 서울고법 선고공판에 출석한 강기훈씨. [중앙포토]

“2014도2946 자살방조 사건. 피고인 강기훈. 검사의 상고를 기각한다.”

 14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1호 법정. 앞서 수십 건의 상고사건에 대한 판결문을 무표정하게 읽어 내려가던 김창석 대법관(재판장)은 잠시 숨을 고른 뒤 강기훈(51)씨 사건의 선고 결과를 고지했다. 짤막한 한마디 후 바로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자 법정 안 방청객들 사이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한마디 들으려고 사반세기를 기다린 건가” “당사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가 있지” 등 자조 섞인 한탄들이 법정을 나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갔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대법관)는 강씨에 대한 재심 상고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이날 확정했다. 강씨가 유서를 대신 써주고 친구의 자살을 부추겼다는 ‘주홍글씨’를 단 지 24년 만이다.

 91년 5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총무부장이었던 강씨는 사회부장이던 고(故) 김기설(당시 25세)씨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유서를 남기고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분신 후 투신 자살하면서 사건에 휘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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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사건 배후로 강씨를 지목했다. 서울지검 강력부는 “유서의 필적이 강씨의 필적과 동일하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속 김모씨의 문서 감정 결과를 핵심 증거로 제시했다. 결국 강씨는 기소돼 징역 3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 이후 학생운동을 바라보는 국민 여론은 싸늘하게 식었고 강씨는 94년 8월 만기 출소했다. 이후 강씨는 “필적 감정 결과가 조작됐다”며 무고함을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사건 수사팀장이었던 강신욱(71) 전 대법관, 팀원이었던 곽상도(56) 법률구조공단 이사장, 남기춘(55) 변호사 등이 검찰 요직에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 사건은 필적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스파이 누명을 썼던 프랑스의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 사건과 비슷해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렸다.

 반전의 계기는 사건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가던 2007년 찾아왔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진상조사에 나선 것이다. 위원회는 김기설씨의 지인이 뒤늦게 발견한 김씨 필적이 담긴 노트를 확보했고 이 필적과 유서를 대조했다. ‘유서와 김씨 필적이 동일하다’는 결과를 얻은 위원회는 진상 규명 결정을 내렸다. 강씨는 이듬해 재심을 청구했고 4년 만에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서울고법 형사10부 심리로 진행된 재심에서 국과수는 “유서와 김씨의 필적이 동일 필적일 가능성이 있다”는 새로운 감정 결과를 내놨다. 재판부는 지난해 2월 무죄를 선고했고 1년3개월 만에 대법원은 “유서와 강씨의 필적은 다르다”며 무죄를 확정했다.

 현재 간암 투병 중인 강씨는 이날 법정에 나오지 않고 휴대전화도 꺼 연락이 되지 않았다. 강씨 측 송상교 변호사는 “잘못에 제대로 책임지려 하지 않는 검찰과 법원의 태도는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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