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9)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32)|「마텔」선생과의 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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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해방후 1947년 여름이었다. 나는 그때 경향신문 주필이었다.
아침에 사설을 쓰고 오후에 내방에서 쉬고있는데 사장 이복영신부가 내방으로 들어오더니 웃으면서 『귀한 손님이 오십니다』하고 손님을 안내하였다. 뒤에 따라 들어오는 손님들은 뜻밖에도 「마텔」선생이었다.
『선생님, 이게 웬일이십니까!』
『잘 있었나? 살아있으면 이렇게 또 만나는 거야!』
선생은 걸걸 웃으면서 나와 굳은 악수를 하였다. 보니까 항상 불콰하고 통통하던 얼굴이었는데 두볼이 홀쭉하게 빠지고 안색이 핼쑥한게 핏기가 없었다. 목덜미도 움푹 파져 있었다.
『선생님, 많이 늙으셨습니다』.
『그럼 늙었지! 내가 「미나미」란 놈한데 쫓겨간것이 벌써 아홉해가 되지 않았나!』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미나미」는 지금 스가모(소압)형무소에 있는데, 사형은 안당해도 한10년 징역을 살겁니다』
『그까진 놈 징역살거나 알거나 누가아나. 그놈, 당해야 싸지! 한국사람이 성을 가는것을 제일 싫어해서 결혼을 해도 남편성을 따라가지 않는데 그것을 「다나까」나 「나까무라」로 고치라니 그게 될번한 소린가! 그래 그걸 나쁘다고 그랬더니 나를 보고 나가라는거야. 그러고도 일본이 안 망할줄 알았나!』
「마텔」선생의 독설은 그전 그대로였다.
『그래, 어떻게 또 오셨어요?』
『조선이 독립되었단 말을 들으니 어디 참을수 있어야지. 그래 「맥아더」사령부에 편지를 냈더니 허가해주더군. 이제 나두 자네네들 같이 소원을 성취한 셈인데 한가지 유감은 그 표독한 일본놈들이 이 땅에서 쫓겨나갈때 어떤 얼굴을 했는지 그것을 못본것이 유감이야. 그래, 일본놈들이 쫓겨갈 때 어떤 모습이었나?』
『그 독살스런 놈들이 풀이 다 죽고 거지꼴이 되어 미국 병정한테 죽는 시늉을 하면서 쫓겨갑디다』
이렇게해서 「마텔」선생과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는데 한가지 놀라운 이야기는 한국사람이 그동안 퍽 변했다는것이었다. 그전에는 온순하고 성실했는데 이번에 와보니 그전과는 딴판으로 사람들이 거칠어지고 속이기를 잘해서 몹시 실망했다고 하였다. 전쟁을 치르고 나서 사람들이 거칠어진것은 사실이고 거짓말과 속임수가 늘어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외국사람이 느낄 지경이었다니 큰일이었다.
「마텕」선생과는 그 뒤에도 몇번 만났는데 서울 북창동에 있는 자기집이 겉으로는 아홉해 전 떠날때처럼 그냥 있기에 반가워서 들어가 보았더니 집속은 엉망이 되었고 늙수그레한 부인네가 거기서 개장국을 해 팔고 있더라고 쓴 얼굴을 지으면서 웃었다.
이듬해 48년 봄, 본국으로 돌아갈 날을 며칠 앞두고 나와 같이 양화진에 있는 「베델」의 산소를 찾았다.
「베델」은 한국이름이 배세이었고 아일전쟁때 영국신문의 종군기자로 조선에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 살았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갖은 못된것을 다하는것을 보고 신문기자로서 의분을 느껴 양기탁과 손을 잡고 영문과 국문으로 신문을 발행하였다.
대한매일신보가 그것인데 사장이 「베델」(배세)이였으므로 무슨 이야기를 써도 일본군이 손을 댈수 없었다.
그러다가 일본군의 박해를 받아 금고형도 당하고 화병으로 1909년 서울에서 죽고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혔다.
「마텔」과는 술친구이고 절친한 사이였다. 4939년에 「미나미」총독한테 쫓겨갈때에도 「베넬」의 묘소를 찾아가서 작별했고 이번에도 귀국하는 길에 찾아가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일세. 자, 잘 있게!』
「마텔」은 산소 앞에 술을 따라놓고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작별인사를 하던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조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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