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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는 사과하라" 태극기와 성조기, 오성홍기로 가득찬 LA다운타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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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LA를 찾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 과거사 왜곡 중단, 일본군 위안부에 사과 등을 촉구하는 시위대가 LA다운타운 한복판을 행진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아베는 거짓말쟁이” “아베는 사과하라.” “아베는 진실을 받아들여라.”

1일 LA다운타운 일대는 아침부터 혼잡했다. 흰색 티셔츠를 입고 피켓을 든 시위 참가자와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대기하고 있는 경찰,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연설하는 행사 참석자와 행사장 주변의 일본·미국 정부기관 관계자가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뒤엉켰다.

시위에는 500명이 모였다. 십대부터 80대까지. 한인부터 중국계, 흑인까지. 한목소리로 아베 총리에 사과를 요구했다. 애초 침묵시위를 예정했지만 이들은 침묵할 수 없었다. 아베 총리에 사과를 촉구하고, 아베 총리로부터 사과를 받을 수 있는 미국에서의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퍼싱스퀘어에 모여 아베 총리와 일본 정부에 “역사를 똑바로 보라”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져라” “반성하라” “말장난은 그만하라”고 외쳤다. 아베 총리가 언급한 ‘인신매매’ 표현에 “바로 일본 정부가 일본군 성노예를 강제동원했다” “일본의 과거 부정이 일본을 수치스럽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자리에서 해롤드 카메야 일본계시민권자연맹 샌퍼낸도밸리 지부 회장은 “미국에 사는 일본인은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다. 일본이 사과를 하지 않고 과거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아베 총리에 사과를 촉구했다.

권용섭 화백이 1일 LA한인타운 다울정 앞에서 흰색 대형 천 위에 위안부 소녀 그림을 그리고 사과를 기다리고 있다는 문구를 쓰고 있다. 신현식 기자

이천필립(14)군은 학교를 결석하고 엄마 이희수(42)씨와 함께 시위에 나왔다. 필립군은 “엄마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알려줘 자료들을 찾아봤다. 화가 났다. 학교 수업보다 아베 총리의 사과를 받아내는 게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시위 참가 이유를 밝혔다. 이희수씨도 “주위 일본계 친구들은 과거에 일본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더라. 심지어 일본이 한국을 도와준 것으로 알고 있더라. 그렇게 교육을 받은 것이다. 그런 와중에 아베 방미 소식을 접하고 있자니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퍼싱스퀘어에서 6가와 올리브길을 따라 행사가 열리는 빌트모어호텔로 향했다. 그 행렬은 한 블록을 가득 메우고도 넘쳤다. 호텔 주위를 둘러쌌다. 호텔에서 대기하고 있던 LA일본총영사관 관계자는 긴장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베 총리가 주차장에서 이어지는 호텔 정문이 아닌 그 옆 VIP용 입구를 이용해 호텔 안 행사장으로 들어간다는 게 알려지면서 시위대는 다시 그랜드길 선상 VIP 출입문 앞으로 몰렸다. 아베 총리를 호위하는 차량 행렬이 호텔 앞을 지나기 시작하자 시위대의 목소리가 커졌다. 차량을 통제한 도로로 나와 LA지역 아시안 커뮤니티의 분노를 아베 총리에 전했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한참을 서서 이를 지켜봤다.

김현정 가주한미포럼 사무국장은 “아베 총리는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아베 총리의 사과를 받지는 못했지만 LA 주민들에 일본의 잘못, 아베 총리의 역사 왜곡 시도를 알렸다”고 강조했다.

이날 LA다운타운은 태극기와 성조기, 오성홍기로 가득했다. 시위에는 오렌지 카운티에 사는 한인이 대거 나왔다. 버스 6대에 나눠 타고 온 중국계 주민들은 난징 대학살에 대한 일본의 사과를 요구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피해를 당한 대만, 태국 등 아시안과 흑인, 라틴계 참가자도 있었다. 일본계 주민도 나와 아베 총리의 잘못을 지적했다. 행인도 관심을 보였다. 지나가다가 한참을 서서 시위를 지켜보거나 시위 이유, 일본이 한 일, 아베 총리의 잘못 등을 자세하기 묻기도 했다. AP통신·ABC·CBS·NBC 등 미국 언론도 앞다퉈 시위를 취재했다.

영 김 가주 하원의원이 1일 LA다운타운 퍼싱스퀘어에서 열린 시위에 참가해 아베 총리에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원하는 건 다른 게 아니다. 진심 어린 사과다.” 영 김 가주 하원의원이 시위에서 강조한 말이다. 김 의원은 “한인, 여성이기에 시위에 참가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원하는 건 다른 게 아니다. 진심 어린 사과다. 말장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워싱턴DC에도 있었고 지금은 LA에 있는 이용수 할머니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하면 된다”고 했다.

경찰은 많았지만 행인 안전, 시위대 보호, 교통체증 해소를 신경쓸 뿐 시위대를 제지하지 않았다. 아베 총리 일행이 탄 차가 모습을 드러내자 시위대 일부가 차도에 진입하는 등 분위기가 다소 격양되자 경찰은 질서유지에 진땀을 빼기도 했다. 아베 총리가 탄 차가 호텔 VIP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시위대와 차가 뒤엉켜 교통 혼잡이 심해지자 수행원 등은 도로에 멈춘 차에서 내려 호텔로 허겁지겁 뛰어 들어갔다. 시위대와 경찰, 시위대와 일본 쪽 관계자 등과의 충돌은 전혀 없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일-미 경제포럼에서 ‘일본 경제 활성화를 위한 비전과 글로벌 사회에서 일본의 역할’을 주제로 연설했다. 포럼에는 페니 프리츠커 연방 상무부 장관, 캐롤라인 케네디 주일미국대사, 케빈 드레온 가주 상원의장, 에릭 가세티 LA시장 등이 참석했다. 포럼에서 이어진 투자세미나에서는 세일즈 외교를 했으며 이후 리틀도쿄에 있는 ‘고 포 브로크 기념비’를 찾아 참배했다. 고 포 브로크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계 군인으로 구성된 442부대의 별칭으로 고 김영옥 대령이 이끌었다. 이 부대 출신 참정용사들이 고 포 브로크 재단과 기념비를 만들었으며 김영옥 대령은 재단 및 기념비 건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베 총리는 오늘(2일) 일본으로 돌아간다.

일본군 위안부 등 전쟁 피해자를 돕는 LA나비와 미주3·1여성동지회 관계자가 다울정 앞에서 일본 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신현식 기자

아베 총리의 방미 일정에 따라 보스턴 하버드대와 위싱턴DC 의사당에서 사과를 촉구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LA에 왔다. 이용수 할머니는 내일(3일) 오후 3시 LA한인타운 노먼디와 4가에 있는 만나교회에서 한인 학생들과 만나 진실을 알린다.

이재희 LA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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