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사진전문기자의네모세상] 내소사 가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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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일 이상 오락가락한 눈에 전북 부안 내소사 가는 길은 온통 눈 세상이다. 어른 여남은 사람을 이어도 그 끝에 이를 수 없을 만큼 시원스레 뻗은 전나무 숲의 푸름은 흰 눈에 묻힌 지 오래다. 사시장철 푸르던 도도함도 쉼 없이 내려앉는 눈에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그나마 속진을 쓸어주는 풋풋한 내음만 숲을 감돌 뿐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순백의 숲길에 내딛는 첫걸음은 언제나 설레기 마련이다. 신세계에 내딛는 첫발처럼 벅찬 가슴 울림이 발끝에서 밀려온다. 저만치 앞서간 마음을 애써 달래고 삶의 흔적인 양 오롯이 뒤따른 발자국을 돌아보는 순간, 툭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눈덩이가 폭포처럼 쏟아진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가지가 부러져 내린 것이다. 무엇이든 넘치면 모자람만 못한 터이니 아름다움도 이와 마찬가지인가 보다.

"아따, 참말로 징하요. 요놈의 눈이 녹을 새도 없이 쌓여버리네요. 벌써 며칠짼지 셀 수도 없당게요. 웬만해야지. 하늘 지붕에 큰 구멍이 났나 보오." 요사이 사람 보기조차 힘들다는 시골 아낙의 넋두리가 괜한 것이 아니다. 빛이 좋은 때를 기다리려 삼각대에 걸쳐둔 카메라의 배터리마저 얼어버렸다. 낭패지만 품에 넣어 녹일 뿐 별 대책이 없다. 살을 에는 바람도 아랑곳없이 두 손을 맞잡은 연인이 숲에 들어선다. 눈 쌓인 가지가 척척 늘어져 숫제 터널이 되어버린 겨울나무 숲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카메라뿐 아니라 얼어붙은 가슴을 녹이는 데 서로 보듬는 온기만 한 것도 없으리라. 품어 안은 카메라에서 어느 새 온기가 전해져 온다.

< HASSELBLAD X-pan 45mm F16 1/30초 Iso 50>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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