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완의광고로보는세상] 소설 '1984년' 애플 '1984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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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기분은 동서고금이 다를 바 없겠으나 1983년 말은 좀 특별했던 것 같다. 2차 세계대전의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은 1948년에 36년 후의 세계를 묘사한 조지 오웰의 암울한 소설 '1984년'이 곧 현실이 되기 때문이었다. 과연 1984년은 소설에서 예언했듯 '빅 브라더'가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모든 인간적인 것을 말살하는 반(反)유토피아의 서막으로 다가올 것인가. 당시 세계의 화두는 '1984년'이었으며 31일 밤과 1일 새벽에 걸쳐 위성을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된 백남준의 비디오 쇼 제목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었다.

1977년 설립된 애플은 한동안 개인용 컴퓨터의 독보적인 생산업체로서 신화적인 성장을 기록했으나 거대 기업 IBM이 PC 시장에 뛰어든 1981년부터 고전하기 시작한다.

당시 마케팅 전문가들의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IBM은 거대 기업의 이점과 메인프레임 전문 회사라는 후광 효과(Halo Effect)까지 살리며 애플의 시장을 빼앗았다. 빼앗긴 시장을 어떻게 해서든 회복하려는 애플은 회심의 역작 매킨토시를 1984년 1월에 내놓는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리는 광고에 '1984년'을 이용한다.

쇠사슬로 발이 서로 묶인 한 떼의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행진해 들어와 앉는다. 그들은 모두 세뇌가 된 듯 표정은 공허하며 눈에 초점이 없다. 벽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서는 빅 브라더가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열변을 토하고 있다. "획일화된 사상은 지구상의 어떤 군대나 함대보다도 강력한 무기다. 우리의 적은 다양한 견해처럼 쪼개질 것이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한 여자가 손에 해머를 들고 이 장소로 달려오고 있다. 그녀를 잡으려는 일단의 군인들이 그녀의 뒤를 쫓고 있다. 마침내 스크린 가까이 접근한 여자는 있는 힘껏 해머를 스크린 쪽으로 날린다. 스크린이 박살 나면서 자막과 함께 성우의 목소리가 들린다. "1월 24일, 애플은 매킨토시를 발매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1984년이 왜 '1984년'과 다른지 알게 됩니다."

60초짜리 이 광고는 그해 1월 22일의 수퍼보울 중계 때 딱 한번 방영되었지만 그 효과는 참으로 엄청났다.

사상을 통제하고 정보를 독점하는 빅 브라더(IBM) 치하에서 진정한 정보민주주의를 위해 몸을 바치는 훌륭한 여인(애플)…. 애플은 당초 발매 100일 안에 5만 대 판매를 예상했으나 이 광고 덕분에 7만2000대나 팔 수 있었다. 또 영화 감독 리들리 스콧이 연출한 이 광고는 '20세기 최고의 TV 광고'로 1999년에 선정되기도 했다.

세상은 더 좋은 방향으로, 더 인간적인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서구의 막연한 낙관론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으로 붕괴됐지만, 그리고 조지 오웰이 '1984년'을 쓴 1948년이나 1984년이나 2005년이나 별로 달라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내년은 올해보다 훨씬 좋아지리라 기대해 본다.

김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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