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한일회담(247)상업차관장액교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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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공동선언 형식을 통한 선국교, 후현안타결 교섭지침은 65년 1월13일 박대통령 주재의 청와대 임시국무회의와 14일의 정총리 주재관계장관회의에서 극비리에 협의됐다.
그러나 이 지침은 내가 본격적으로 일본측의 의중을 탐색하기도 전에 사문화하는 운명을 맞았다.
정부는 이 지침을 미국측에 알려 과연 이 방식대로하면 일본측이 응할지를 자문해보았는데, 미국측의 부정적인 반응을 받고 치침철회 훈령을 바로 나에게 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김-대평메모의 청구권 합의액수 6억달러의 틀을좀 늘려보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했다.
「3, 2, 1+α」라는 틀에서 재정차관 (2억달려) 및 1+α (상업차관) 를 증액교섭하는 방안을 골몰히 연구하던 차에 마침 삼성의 이병철회장과 만나게 됐다.
이회장은 한비차관 교섭문제로 일본왕래가 잦았고 또 일본재계나 관계와 면식이 넓어 내가 한일교섭에 관해 자주 자문을 받는처지였다.
나는 한일현안들 타결하더라도 국민감정을 생각하면 김-대평메모에 의한 청구권 액수로는 체면치레가 되기어렵다고 말하고 그래서 청구권 액수를 좀 늘려볼 교섭을 하고 있는데 좋은 방안이 없겠는가고 자문을 구했다.
이회장은 그것 참 좋은 구상인데 일본측이 무상원조를 더 늘려주기는 정치적 입장으로 봐서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차관교섭을 해야하는데, 장기차관은 일본외화 사정으로 응하지 않을테지만 상업차관이라면 자기네 물건팔고 이자받는 것이니 잘 교섭하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얘기를 듣고 보니 과연 그렇겠다싶어 「우시바」 심의관과 이 문제를 교섭해볼 작정이니 「우시바」 심의관을 만나 즉면지원을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회장은 외교문제에 관여하기를 꺼려 사양했으나 결국 나의간청을 받아들여 「우시바」 심의관과 이 문제를 얘기했다.
이회장은 「우시바」 심의관을 골프에 초대한후 식사를 함께 하면서 인도·파키스탄등에 대한 몫으로 책정한 상업차관중 남은 것을 한국에 들린다면 한일양국에 다같이 큰 이득이 필 것이라고 설득했다.
「우시바」 심의관은 처음에는 난색들 표시했으나 협조를 약속했다고 한다.
나는 이회장의 측면지원을 받으면서 김-대평메모의 「3, 2, 1+α」청구권 합의분중 「1+α」최소한 5억∼6억달러로는 만들어야겠다고 맹렬히 교섭해 어느정도 타협이 성립됐다.
그러나 정부는 경제부처의 의견을 채택해서「1+α」의 상업차관은 3억달러선에서 그치는 대신 유상 2억달러 (정부재정차관)의 이자조건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교섭하라는 지침을 내려 상업차관 증액건중 3억달러 이상분은 재정차관 이자인하와 바터하는 형식으로 유야무야됐다.
이회장과 나는 최근 사석에서만나 만약 그때 이자를 깎는 대신 상업차관을 좀더 많이 도입하여 공장건설을 했더라면 지금의 한국경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 뒤 한일협정에 의한 상업차관 3억달러를 소진한뒤 추가차관을 얻기위해 얼마나 고생했던가를 얘기하면서 그때 2억달러를 놓친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돌이겨보면 그때의 2억달러는 지금의 20억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었으므로 그때 상업차관을 좀더 확보했더라면 한국경제의 성장단계를 훨씬 앞당길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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