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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와 민주주의 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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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의 외교관이자 역사학자인 조지 케넌은 "국민이 진정한 자주정부를 갖기 위해서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하며, 또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때로는 이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썼다.

미국의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자살하지 않는 민주주의란 없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그루지야나 우크라이나와 같은 신생 민주주의 국가뿐 아니라 미국에도 적용될 수 있다.

부시는 '자유의 행진'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미국에 의한 이라크의 민주화는 중동 전역에 민주주의가 전파되는 중대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됐지만 출발은 별로 좋지 않다.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에서도 민주주의 실험은 성공적이지 않다. 정파 간 또는 정치인 개인 간 권력다툼은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이들 국가에서의 혁명은 선거에 의한 것이었다. 선거에서 친미 인사들은 대중 선전과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시위를 이끈 젊은 민주주의 운동가들 중 상당수는 워싱턴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미국 정부 또는 현지에서 활동 중인 친미적 성향의 비정부기구로부터 자금 등을 지원받고 있다.

신흥 민주 국가에서 권력은 여전히 소수 정파들이 독점하고 있으며, 정치는 이전보다 훨씬 정교하게 조작되고 있다. 국가 재산은 개인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고 있다.

민주주의는 인류가 애초부터 갖고 태어난 제도가 아니다. 역사적 경험과 철학적 성찰에 의해 학습된 가치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성취하기 힘들 뿐 아니라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민주주의는 자유선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발전에 의해 이룩된다. 다수결의 원칙이 존중되고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이뤄져야 한다. 정치적 견해 차이는 대결이 아닌 대화와 협상을 통해 조정돼야 한다.

권력자가 개입된 분쟁에서도 법은 공정하게 집행돼야 한다. 사유 재산과 국가 재산의 구별이 지켜져야 하며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 이러한 민주적 문화는 역사적 경험과 교육의 산물이다. 쉽게 수입할 수 있는 정치적 프로그램이 결코 아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가 선동에 의해 쉽게 파괴될 수 있다고 간파했다. 몽테스키외와 헤겔은 민주주의를 흘러간 제도로 간주했다. 너무 불안정한 제도여서 제대로 된 정부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 증명됐다고 했다.

장 자크 루소의 후계자들만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민주적 존재라고 믿고 있다. 불행히도 루소의 후계자들 중에는 현재 미국의 가장 강력한 위정자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부시 대통령과 백악관의 네오콘(신보수주의)은 물론 민주당 인사, 심지어 대학의 진보 지식인들 중에도 루소 신봉자가 있다. 부시의 '자유 십자군계획'은 미국의 꼭두각시를 중동과 옛 소련 땅에 심으려는 중앙정보국(CIA)의 공작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있다. 이라크는 중동.옛소련.러시아 등에 민주주의의 교범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현재의 이라크 상황은 구질서가 파괴된 자리에 무질서가 자리 잡을 것이라는 점을 예고하고 있다.

윌리엄 파프 IHT 칼럼니스트

정리=한경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