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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즐거움/이 세상적인 것과 저 세상적인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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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철학적 관점에서 사람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면 「이세상적인」 사람과 「저 세상적인」 사람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이 세상적인 사람은 구체적이며 매사를 겅험적으로 확인해야 비로소 믿으려는 경향이 있고 가치의기준을 현세적인 데에다 둔다.한편 저 세상적인 사람은 대체로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서 구체적인 것을 오히려 의심하고 현실적 삶을 과도기적 현상으로 보며 내세에서 궁극적 가치를 찾아보려는 겅향이 있다.
철학자들은 현실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라고 볼수는 없지만 그들도 역시 이 세상적인 철학자와 저 세상적인철학자로 나뉘어 서로 좋은 대조를 이루며 상반된 학파를 형성하기도하고 각기 다른 종류의 진리를 주장하기도 한다. 예를들어 공자는 좀처럼 내세를 언급하지 않았고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일과 죽음에 대해서 물었읕때도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귀신을 섬기겠는가 (미능사인, 언득사귀)』라고 꾸짖었으며 다시 『삶도모르면서 죽음을 어떻게 알갰는가 (미지생, 언지사)』라고탄식하였다 하니 분명히 저세상적인 사람은 아니었던것같다.
서양철학에서는 이러한 대조가 비교적 뚜렷한 편인데 그 좋은 예를 우리는 이미「플라톤」 의 이데아설과 「아리스토텔래스」 의 보체론에서 찾아볼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 과「아리스트텔레스」의 대립은 중세철학에서도 여전했다.즉 실제로 존재하는것이 추상척인 보편(Universals) 인지 그렇지 않으면 구체적인 개물 (Particulars) 들 뿐인지의 논쟁으로 나타났다.다시말해서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예를들어 야구공이나 축구공,혹은 배구공들 뿐인지,혹은 그것들은 「공」 이라는 보편적인것의 나타남에 불과한 것인지의 여부를 따지는 논쟁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논쟁은 쓸모 없는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은 것 같고 실생활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다.
그것이 운동선수들이나 관중혹은 공을 제조하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
그러나 중세에서는 기독교인들의 신이 어떠한 형태를 띠고 우리에게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인지의 문체를 둘러싸고 이 논쟁은 자못 심각한 종교적 이념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역사가들은 그 시기를 문화가 침체되어 있었다고 해서 「암흑의 시대」 로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이 공정한 것인지는 물론 논란의 여지가있지만 적어도 철학만은 종교적 교의 (Dogma)를 무조건 합리화해야 하는 「신학의시녀」 로 전락해 있였던 것이사실이고 그 당시 철학은 교회에 속한 학원(Schola)에서 다루어졌고 철학자들에게 부과된 가장 큰 과제중의 하나는 성부·성자·성령등의삼위가 어떻개 해서 일체가되는지를 해명하는 일이었다.
이 문제는 이미 550년깨 「필로폰」 (John Philopon)에 의해 제기된바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논란이된것은 스콜라철학에서였다.
「플라톤」 의 영향이 짙였던 초기에는 성 안셀무스 (St.Anselmus) 를 중심으로 삼위일체설을 증명해내기가 비교적 쉬웠다. 신은 가장 보편적이고 완전하기 때문애 존재해야 하고 삼위는 그 신이인간에에 나타난 모습이라고 설명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보편적인것의 실재를 전재로 하면 신은 「아담」 이 범한 「인류」 라는 보편의 죄를 구원하기 위하여「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우리애게 온것이 되고 교회도 한낱 기독교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가톨릭」(Catholic은원래 보편이라는 뜻이다) 으로서 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권능을 지니게 되며 「그리스도」 가 구세주라는것, 그리고 신의 징벌이 곧 인간들의 전멸을 뜻하지 않는다는것 등이 모두 순조롭게 설명되되는것이다.
그러나 「플라톤」 적인 이데아는 개개의 사물속에 있다고 역설한「아리스트텔레스」의 사상이 중세의 철학자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보편이란것은 허황한 이름, 즉 「명목」 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로셀리누스」 (Roselinus)인데 그에 의하면 『보편적인것은 음성이나 이름에 불과』 하며 이름이란 인간이 자기의 생각을 남에게 절달하기위해 임의로 만든 부호일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이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삼위는 삼체로 나타나고 기독교는 삼신론을 전제로 한 다신교가 되고만다.
더구나 교회의 권위와 교리도 그 진실성을 의심받게되고 「아담」 의 원죄나 「그리스도」의 수난과 같은 종교적 사실도 단순한 역사적 사건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해석될수 있다.
이것은 공허한듯한 형이상학적 논쟁이 현실적으로 열마나 큰 중요성을 지니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고 볼수있다.
중세에는 물론 「로셀리누스」의 입장같은 것은 허용될수가 없었다.그러나 보편이라는것이 공허한 이름이거나 상상력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쉽사리 부정될수 있는것은 아니다.그리하여「아밸라르두스」(Abelardus) 는 양자를 조화시켜 보편은 『이미 신의 정신속에 사물의 모형으로 있다』 고 설명하였으나 교희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도 위험한 생각으로 비쳤다.
교황은 결국 1092년 솨송 (Soissons)회의에서 이들 명목론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에대한 모든 논쟁을 근지시키며 삼위일체설이 교의임을 다시 확인하였다.철학자들이란 시녀로서는 역시 어설픈 존재들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삼신론에대한 대안은 침묵밖에 없다』 고 말한 성 「아우그스티누스」(Augustinus) 의 말을 상기해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곧철학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철학적 사유와 분석의 범위를 넘어서는 종교의 영역이 따로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여하튼 인간이 이 세상적인 사람과 저 세상적인 사람으로 구분될수있고 저 세상적인 사람들 중에도 더욱더 저 세상적인 사람이 있다는 사실올 깨닫는것은 매우 흥미있고 또 중요한 일이 아닐수없다.사람들은 떤 부류에 속하느냐에 따라 에 상응는 진리를 창출해내고 그 진리를 신봉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철학을 하는 사람의 진정한 즐거움은 내가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지를 먼저 확인하고 또 그렇게살아가면서 다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도 애정과 연민을 함께 보낼줄 아는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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