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9>제80화 한일회담(188)|봇물 터진 일본 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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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장면정권 아래서 주목된 한일관계의 하나는 종래의 배일정책의 반동으로 일어난 일본 붐이었다. 일본서적, 특히 문학작품의 번역이 대 유행을 이루었고 일본 가요의 레코드가 판매되는 한편 일본어 강습소가 곳곳에 문을 열었다』
『일본외교사』의 이 같은 서술을 빌 필요도 없이 민주정권시대의 일본 열기는 터진 봇물 감았다.
이 같은 사회 현상에선 상리가 가장 먼저 움직이게 마련이었다. 장면 정권이 친일정책용 표명하자 한일의 정치인과 상인들이 뛰기 시작했다.
그 단적인 예가 중석 수출 대행권을 둘러싼 일본 동경식품의 1백만 달러 제공설이었다. 일본인들은 알게 모르게 한국을 방문해 전전 한국재산의 향방을 탐문했으며 일본 실업인 들은 이권을 놓칠세라 줄을 잡을 은밀한 공작을 했다.
이에 부화 뇌동한 한국인들의 볼품 사나운 행동거지가 세간의 놀라움과 손가락질을 아울러 자아내던 시기였다. 일본인들의 기민한 행동반경은「고사까」일본 외상의 방한 때 수행 취재했던 27명의 기자 중 수명이 1박2일간의 체한 기간 중 상동층석 광산을 답사하고 갔다는데 서도 잘 드러난다.
일부 국민들과 학생들은 물론 야당인 신민당도 이 같은 풍조의 만연을 비판했고 일본측도 한국 모리배들의 이권 청탁에 꽤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사와다」수석대표는 유진오 수석 대표와 61년5윌4일 비공식 회담을 통해 『막연히 한국의 개인들이 찾아와서 경제 협력에 관한 이야기를 해도 우리들은 그들을 믿을 수 없으므로 비공식적이라도 좋으니 정식 창구를 통해 한국의 경제건설 계획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일부 한일 인사들이 새 세상을 만난 듯이 날 뛰고 있었음에도 한일 회담은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한국의 정정에 불안을 느낀 일본이 정관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를 타개하고 주도권을 잡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정계실력자의 방한 초청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 초청 계획의 실무자였던 엄영달 아주 과장은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일회담을 촉진하려면 일본인들과 더 친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항상 우리만 갔으니 푸대접을 받는 것이 상례였다.
회담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그들을 오게 해야 한다. 그렇다고 외무성 등의 관리를 오게 할 수 없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양원 방한이 추진됐다. 국회 의원들은 어느 나라 고간에관리들보다 자유롭게 말하므로 진의도 탐색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래서 61년 5윌 6일 「노다」(야전부일)의원을 단장으로 한 일본 위원단 3명 (모두 대신 급 중진의원이였음)이 이 땅에 정치인으로서는 처음 발을 내대었다.
이 위원단에는「사또」(주등영작) 수상에 이어 재상이 된 「다나까」(전중각영)의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나도 계동의 박흥식씨 저택에서 베풀어 진 환영연에 참석해 처음으로 그와 알게 되는 연을 맺었다.
1주일간 머무르고 13일 떠난 이들의 방한 중 장면 총리 이하 여당 의원들과 실업인 들이 베푼 환대는 도롤 지나쳐 세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고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떤 공식석상에서는 우리 의원들이 일제의 군가를 고창 했을 정도였으니 그 분위기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짐작이 될 것이다.
장 총리는 이들에게 7월로 예정된 방미 길의 귀로에 일본을 친선 방문해 현안타결에 앞장서겠다는 의중을 밝혔다.
일본측도 『4월 위기를 무사히 넘긴 것을 축하한다』(「사와다」수석대표) 면서 한일회담의 진전을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일 태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시점에 민주당 정권의 날은 저물고 있었던 것이다. 만사휴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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