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동북아 공동체, 안전보장틀 필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장인성 교수

이노구치 다카시(猪口孝) 교수
이노구치 교수와의 만남은 8월 2일 도쿄 고라쿠엔에 있는 주오대정책대학원에서 있었다. 올 초 도쿄대를 정년퇴직하고 이곳에 새연구실을 마련한 그는 한증막 같은 무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연구에 몰두해 있었다. 첫 인상은 소탈했지만 이야기를 해갈수록 국제적 안목을 지닌 학자의 풍모가 느껴졌다.

동북아, 혹은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가 한창이다. 논자들은 '번영과 발전의 동북아 시대'의 도래를 꿈꾼다. 지난날 동북아는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라는 슬로건에 묶여 있었다. 이 표현은 냉전체제와 미국의 세계전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지역의 수동성을 함축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역협력이나 공동체 논의를 통해 능동적인 의미를 더해가고 있다. 탈냉전과 세계화가 지역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동북아를 변모시키고 있는 것이다. 동북아 공동체론이나 논란이 된 '동북아 경제중심''동북아 허브국가' 등의 표어가 어떤 과신마저 느끼게 하는 이때, 국제관계 전문가인 이노구치 다카시 교수를 찾아 동아시아의 미래를 물었다.

동북아 공동체에 관한 구상은 상상의 표현이다. '경제공동체''안보공동체''인식공동체' 등은 지식인의 일상어가 되고 있다. 동북아 공동체는 수많은 학술회의의 인기 의제로 토론의 단골 대상이 됐다. 이와 관련해 일국 중심적 민족주의를 넘어 동북아 수준에서 사유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동북아시대' 혹은 '동북아 공동체'는 현실의 반영일까, 아니면 상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동북아 지역공동체의 실현은 가능할까. 우리의 동북아 공동체 기획은 너무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것은 아닐까. 동북아에 속하면서도 비교적 냉정한 일본의 석학 이노구치 다카시(猪口孝.62) 도쿄대 명예교수를 만나러 가면서 떠오른 질문들이다.

이노구치 교수는 신중론자였다. "동북아시대나 동북아공동체 구상은 가치나 규칙이나 대화의 수준이나 뭔가를 공감하고 함께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을 생각했을 때, 아직 초기단계이며 담론 수준에 머물러 있죠"라는 조심스러운 진단으로 말문을 열었다. "동북아를 적극적으로 의식하고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죠"라는 낙관의 한마디가 이어졌다.

-그렇다면 동북아 협력이나 공동체 실현을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우선 경제.기술.금융.통신 등의 기능적 통합이 필요한데 이는 초기 조건이지 공동체의 성립을 보장하지는 않죠. 지역 정체성도 중요하지만 한.중.일 간에 편차가 매우 큽니다. 한국이 가장 강하고 중국이 제일 약하죠. 또한 안전보장의 틀 없이는 공동체 실현이 어렵습니다. 어려운 문제라 서로 얘기하기 꺼리는 주제이긴 합니다. 민주주의도 요구됩니다. 미국은 북한과 중국의 민주화를 이끌어내려 할 텐데 동북아공동체 구상과 어떻게 조응할지 문제군요."

이노구치 교수는 세계화가 동북아 지역협력을 이루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상반된 두 힘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세계화는 국내에서 경쟁부문과 비경쟁부문을 세분화할 뿐 아니라 세계 다른 지역과의 통합을 유발시키는 힘이 있죠. 때문에 종래와 같은 국민경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계화의 충격이 국가적 단합과 민족주의를 자극하기도 하며, 실제 한.중.일의 민족주의가 편향된 인상을 주어 공연히 일을 번거롭게 만드는 경우도 많죠. 한국과 중국의 민족주의는 별로 변한 것 같지 않습니다. 일본의 민족주의는 좀 약해진 감이 있지만 유럽에 비하면 그렇지도 않지요."

-세계화와 민족주의는 상호 연관되면서 동북아 지역의 통합과 대립을 자극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는 말씀인데요. 동북아 공간의 대립 분열을 일으키는 요소에는 동북아인의 공간인식이나 정체성의 차이도 있지 않을까요. 한국인은 동북아 공간을 일종의 절대공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일본인과 중국인의 경우는 다르죠.

"맞는 지적입니다. 공간인식의 차이 때문에 동북아 공동체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도 다릅니다. 한국은 시장의 힘이나 미국.일본.중국의 힘에 밀려나거나 흡수될 여지가 있기에 목소리를 크게 내야만 합니다. 한.중.일 국민 간의 신뢰는 비교적 높지만, 일본인의 경우 대륙 아시아에 불안을 느끼는 것 같고, 신뢰감을 갖고 함께하려는 의욕이 한국보다 낮죠."

-동북아에 관여하는 열강, 특히 미국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죠. 미국은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했지만 양국 관계의 형태로 관여함으로써 동북아 지역형성을 방해한 측면도 있기 때문인데요. 특히 중국의 부상을 고려했을 때 미.일 동맹은 지역형성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일본인은 대부분 특별한 군사관계 때문에 미국과는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죠. 방해 요인으로 보는 일본인도 있지만 60~70%는 얼마간 대안이 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얼마나 우호적이어야 할지는 별로 자신이 없어 해요. 미.일 동맹이 영원할지도 모르는 일이죠. 미.일 관계도 바뀌고 있고요. 미국과 일본은 한국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비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중국의 부상이 단기적으로 일본의 경계심을 유발할 가능성은 있지만 경계심만 있는 건 아니죠. 경제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매우 강합니다."

-진정한 동북아 지역협력이나 공동체 형성을 이루려면 경제대국인 일본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은 지역 리더십을 행사하고 싶어하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데요. 이 방어적 사고는 어디서 나온 걸까요.

"일본인은 소득이 높아졌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현상 유지적 사고에 젖어 있습니다. 특히 책임감이나 의무감을 갖고 대외적으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걸 아주 싫어하죠. 일본인은 태평양전쟁 때 서양 국가들과 싸워 탈식민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자신들이 치른 희생만 생각하고 아시아국가의 고통과 비참함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합니다. 원폭 문제나 야스쿠니 문제도 마찬가지죠. 자국의 피해나 고통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려는 의식이 부족해요. 때문에 주장의 보편성이 약하고 일본 예외주의로 간주해 버리죠."

-세계화나 미국의 존재와 같은 외부적 요인, 역내 민족주의의 영향도 있지만 국가가 사회보다 강한 현실도 중요한 원인이 아닐까요. 사회영역이 민주화되고 민간교류나 학술교류 등 국경을 넘어 대화하는 장(forum)이 확충된다면 국가와 지역을 바꿀 수 있는 여지도 커질 텐데요.

"국가가 거대한 권력을 행사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세계화와 탈냉전의 상황에서 우선 지방 정치단위나 경제단위의 국경을 초월한 교류가 필요합니다. 연방주의와 같은 지방분권화도 필요하죠. 일본은 5, 6개의 행정단위를 만들어 사회.교육정책을 지방정부에 위임하게 됩니다. 한국도 연방주의 비슷하게 가지 않을까요. 중국도 경제가 발전하면 사회.교육.민족 등에 관한 정책은 분권화할 수밖에 없겠죠. 연방주의가 진척되면 국가권력은 약해지고 지역의 의미가 커질 것입니다."

-동북아 정체성의 자각에는 외부적 요인도 필요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죠. 세계화.정보화시대에 동북아 정체성의 자율적 형성과 관련해 동북아의 문명이나 규범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아시아적 가치는 동북아 문명의 한 요소일 수 있지만 유럽공동체의 기독교 수준도 아니고 경험적으로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냉전 종식 후 서구적 가치관에 대한 방어적 목소리로서 유효했을 뿐 이젠 신봉자가 별로 없죠. 동북아 문명은 세계 문명의 한 지방적.지역적 변형으로 보아야 한.중.일의 공통점이 더 잘 드러납니다. 합리주의.세속주의.발전주의 등 세계 문명의 요소를 공유하는 한편 예의범절을 중시해야 돼요. 합리주의와 세속주의는 서유럽과 북미에서 강하지만, 발전주의나 예의범절은 동북아의 두드러진 공통점이죠. 이들 네 요소는 동북아의 교류 증대와 정체성 형성에 중요합니다."

이노구치 교수와 대화를 해나갈수록 그의 신중한 낙관론, 혹은 현실주의적 낙관론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그는 지역형성에서 경제와 문화의 기능을 중시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제도적인 틀을 창출하려는 지적.정치적 노력'을 관건으로 본다. 아울러 초기 단계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이견보다는 공감 영역의 확대에 주목한다. "어떤 공통의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는 인식과 이해"다. 이 과정에는 상대를 대화의 상대로 용인하는 인정성과 상대를 관용하고 공존을 추구하는 진정성이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이를 '응답공동체'라 불렀다. "타자의 말이 이상하다고 느끼면 자신의 생각도 좀 이상하구나,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하다 보면 점차 상대를 이해하게 되죠. 응답공동체랄까, 그런 느낌이 들면 좋겠죠."

이노구치 다카시(猪口孝) 교수는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정치학자다. 도쿄(東京)대 학부와 대학원에서 국제관계론을 공부했고 미국 MIT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교수를 지냈고 제네바대.하버드대.베이징대 등에서 연구와 강의를 수행했으며 일본국제정치학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일본 주오(中央)대 교수이자 도쿄대 명예교수로 동아시아 정치학자 컨소시엄의 공동의장을 맡아 동아시아 학술공동체의 형성에 힘쓰고 있다. 전공은 정치이론.비교정치.동아시아정치.정치경제.국제안보.국제정치경제 등 폭이 넓다. 미래 세계정치에 관한 식견을 토대로 국제정치의 계량분석과 국제관계의 역사적 성찰을 병행하는 연구를 수행해 왔다.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수량분석'이후 최근의 '글로벌 거버넌스''동아시아 학술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세계 정치와 일본 정치,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분석한 수십 권의 전문서를 저술했다.

장인성 교수는

서울대 외교학과 소속이다. 서울대 학부와 대학원을 마쳤고 일본 도쿄대에서 국제관계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장소의 국제정치사상'이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