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 칼럼] 아내와 용돈문제로 다투지 않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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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객원기자

은퇴하고 나면 아쉬운 것 중 하나가 용돈이다. 용돈의 사전적 의미는 특별한 목적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이다. 은퇴하고 나서도 친구 등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취미생활도 해야 하기 때문에 용돈은 여전히 유효한 존재다. 하지만 소득흐름이 확 줄어드는 마당에 현역시절처럼 용돈을 풍족하게 쓰기 힘들다. 비자금을 모아놓지 않은 이상 자식들의 지원을 받아 쓰는 경우가 많다.

삼성생명은퇴연구소가 2012년 발표한 ‘자녀의 경제적 지원과 은퇴자 삶의 만족’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대상 1392명 가운데 760명(54.6%)은 자녀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으로 집계됐다. 자녀들의 평균 연간 지원액은 393만3000원이었다. 이를 월별로 환산하면 32만7750원이다. 이 중 74.9%는 정기적인 지원이었다. 자녀들의 성별별로는 아들의 지원액이 67.7%를 차지했다.

자녀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은퇴자의 연 소득은 935만원이었다. 월 소득으로 치면 78만원이다. 개인 총소득 중 자녀 지원액의 비중이 43%라는 의미다. 이와 달리 자녀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은퇴자의 연 소득은 648만원(월 54만원)이었다.

아내가 자녀의 용돈 지원통로 독점

문제는 용돈 관리 방법이다. 은퇴 가정은 대개 부인이 자녀의 용돈 지원통로를 독점한다. 10년전 은퇴한 A씨 사례다. 그에겐 결혼한 아들이 둘 있는데, 한달에 각 30만원씩 용돈을 보내온다. 그런데 아내의 통장에 입금을 하기 때문에 용돈 관리는 자연스럽게 아내의 몫이다. 필요할 때마다 얼마씩 타다 쓸 수 밖에 없다.

처음엔 집에서 노는 사람이 왠 용돈을 그렇게 많이 쓰냐며 아내가 잔소리를 하는 통에 여러 차례 언쟁을 벌였다. 그러다 몇 만원 가지고 다투는 게 싫어 용돈 규모를 줄이고 집 밖의 활동도 의식적으로 자제했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분수에 맞는 용돈 씀씀이가 되더라는 것이다.

물론 부모 용돈을 따로 챙겨주는 자식들도 있다. 대학 선배 B씨의 사례다. 의사인 아들은 3년전 결혼해 첫 아이를 난 후부터 용돈을 보내오고 있다. 자신과 아내 똑같이 50만원씩이다. 아내가 부모 용돈을 왜 자기한테 안 주느냐고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따로 용돈'에 적응했다고 한다. 그는 "용돈 때문에 아내와 다투는 일 없어서 좋다. 아빠도 자식 키운 보람 같은 것을 아내와 똑같이 누릴 자격이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자녀가 부모 용돈을 엄마를 통해 지원하는 것은 자랄 때 엄마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용돈을 주로 엄마한테 타 쓴다. 직장생활을 하는 아버지는 자녀 문제에 관한 한 국외자나 다름없다. 우리나라 특유의 가부장적 문화로 자녀와 대화조차 뜸하다. 자녀의 머릿 돗엔 아버지는 돈 벌어오는 사람, 엄마는 그 돈으로 살림을 꾸려가는 사람으로 박혀 있다. 아버지가 은퇴해도 이런 생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자녀가 은퇴한 부모에게 용돈을 줄 때 왜 엄마를 매개로 하는지는 이런 배경을 깔고 있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만큼 용돈의 필요성이 크지 않다. 자녀가 보내준 용돈을 살림에 보태 쓰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은퇴 가정의 경제권을 쥔 아내에게 남편의 용돈은 어쩌면 사치일 뿐이다.

자녀에게 은퇴생활 실상 알려야

부족한 용돈이 자극제가 돼 스스로 용돈 벌이에 나선 경우도 있다. 대학 선배 C씨가 그랬다. 금융회사 임원으로 있다가 퇴직한 그는 퇴직후에도 각종 모임으로 용돈이 늘 부족했다. 용돈을 올려달라고 아내한테 말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이래 가지곤 안되겠다 싶어 친구와 대책을 논의했다. 그 친구는 한 금융단체에서 운영하는 파견교사 자리를 알선해 주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경제강의를 하는 일인데, 한번 갈 때마다 20만원의 강의료가 나왔다. 한달에 평균 100만원 정도는 벌어 퇴직후 중단했던 골프까지 즐기게 됐다. 그는 "죽을 때까지 꼭 필요한 건 아내의 잔소리 안 듣고 맘 편히 쓸 수 있는 용돈” 이라고 했다.

용돈 문제는 재취업이나 창업을 통해 독립적 경제력을 키워 해결하는 게 가장 좋다. 현역 때 틈틈이 비자금을 조성해 노후에 쓸 용돈 재원을 만들어 놓는 것도 바람직하다. 만약 비자금을 만들지 못했다면 자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때 평소 자녀와 대화기회를 자주 갖고 은퇴한 아빠의 실상을 정확히 알리는 게 중요하다.

서명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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