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 남자들의 여행법②] 파리의 재발견 곳곳에 숨겨진 전시와 음악, 공연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오페라 가르니에 내부.

해외 음악을 소개하는 직업의 특성상 매년 1월 말에서 2월 초엔 프랑스 칸을 찾는다. 칸의 명소 팔레 데 페스티벌에서 열리는 음악 박람회인 미뎀(MIDEM)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일하러 가는 것이라 지치고 피곤하기도 하지만 미뎀은 다른 출장보다는 조금 특별하다. 한국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다양한 공연도 볼 수 있고, 아티스트는 물론 프로듀서와 공연기획자 등 음악산업에 종사하는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며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뎀이 특별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칸에서의 일정을 마친 후, 짧은 시간이나마 파리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이후 매년 미뎀 출장을 갔으니 이제 이 연례행사 후 파리에서 시간을 보내는 데도 나름의 노하우가 쌓였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간략히 말하자면 ‘내가 파리를 즐기는 방법’이지만, 세 번째(혹은 그 이상의) 파리 여행을 준비 중인 분들이나 파리 문화 여행을 꿈꾸는 분들에게 작은 팁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올랭피아 입구.

미뎀에서의 모든 일정을 끝내고 다음 날 이른 아침, 칸 역으로 가 파리행 TGV에 오른다. 출발할 때는 아직 어두운 하늘이지만 잠시 시간이 흐르면 곧 맑은 햇살이 반겨준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파란 바다. 마르세유에 이르기까지 창밖으로 보이는 쪽빛 지중해는 비행기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는 기차를 탄 데 대한 보상일 것이다. 오후 1시가 넘으면 기차는 파리 리옹역에 도착한다. 코트다쥐르에서 출발하여 중부의 평야지대를 관통해 파리에 이르는 여정은 아무리 고속열차라도 거의 5시간이 소요되기에 몸은 이미 지쳐 있다. 하지만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서며 파리의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오면 신기하게도 피곤함은 곧 가신다. 파리는 지금 살고 있는 서울을 제외하면 가장 오래 머물렀던 도시이니 이제는 꽤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오페라 바스티유

먼저 오페라 거리로 나간다. 그리고 샹젤리제를 따라 걷는다. 햇살을 받으면 좋지만, 날이 흐려도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들 사이를 목적 없이 걸어가는 것으로 파리와 먼저 인사를 나눈다. 루브르 박물관을 거쳐 튈르리 정원의 벤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개선문이 보일 때까지 걸어간다. 이 산책의 순간, 눈여겨봐야 할 것은 거리 곳곳에 자리한 안내 포스터다. 이것들만 봐도 지금 현재 파리 도처에서 어떤 멋진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선셋/선사이드

이렇게 포스터를 통해 정보를 얻고 보게 된 전시 중 아직까지도 가끔 생각나는 것이 2012년 10월부터 2013년 1월까지 그랑 팔레에서 열렸던 에드워드 호퍼의 전시회다. 자정까지 문을 열었던 전시회 마지막 날, 대기표를 받고 줄을 서서 입장하기까지 거의 2시간을 기다렸던 것 같다(파리지앵들이 미국 화가에 이렇게 큰 관심을 보일 줄이야!). 차디찬 겨울 파리의 날씨가 원망스러웠던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그랑 팔레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이후 3시간은 풍요로움으로 가득한 감흥의 순간들이었다. 특히 ‘Summertime’이라는 작품 앞에서 느꼈던 따스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우연히 찾은 전시회장에서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느꼈기에 더욱 감동받았던 것이리라.

그런 경험은 또 있다. 언젠가 마레 지구에서 점심을 먹은 후 소화도 시킬 겸 센 강까지 걷던 도중, 파리 시청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게 보였다. <파리의 사랑을 위하여(pour l’amour de paris)>라는 이름이 붙은 브라사이(Brassai)의 사진전이었다. 1899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브라사이가 파리로 이주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다섯 때였다. 이 사진전에는 파리의 매력에 빠져든 한 작가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브라사이가 작품으로 남겼던 파리의 모습 중 일부는 여전히 그때 그대로다. 이 전시 후 파리를 산책하다 사진으로 봤던 옛 파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브라사이 사진전의 추억이 떠오르며 반가운 마음이 든다. 이것 역시 우연한 만남이 주는 기쁨일 것이다.

필하모니 드 파리 홀

낮 시간 동안 전시를 보며 눈이 즐거웠다면 해가 지고 나면 귀가 즐거울 차례다. 파리에서는 클래식, 재즈, 샹송, 팝에 이르는 다양한 공연들을 매일 밤 만날 수 있다. 우선 재즈를 보면 파리에는 ‘선셋/선사이드(Sunset/Sunside)’, ‘르 프티 주르날 몽파르나스(Le Petit Journal Montparnasse)’ 등 유럽에서도 유서 깊은 재즈 클럽들이 여럿 자리 잡고 있다. 과거 많은 미국 재즈 연주자들이 생활고에 시달려 유럽으로 건너왔을 때, 파리는 이들을 온화하게 품어준 도시였다. 여기에 프랑스가 자랑하는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로부터 이어진 집시 재즈의 전통을 더한 현대 프랑스 재즈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채로움과 깊이를 자랑한다.

샹송이 듣고 싶다면 오페라 극장 인근에 위치한 ‘올랭피아’로 향한다. 샹송은 물론 재즈, 월드뮤직, 팝 공연이 매일 밤 열리는데 운이 좋으면 당일 티켓을 구할 수도 있다. 유명한 공연의 경우는 이미 매진되어 아쉽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지만, 저녁의 운을 시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실패하더라도 주말이라면 한 번 더 기회가 있다. 올랭피아에서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마들렌 성당에서 거의 주말마다 공연이 열리기 때문이다. 일전에 올랭피아에서 거장 샹송 가수 샤를 아즈나부르의 공연을 놓쳤으나, 그 대신 마들렌 성당에서 20유로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헨델의 성가 공연을 본 경험이 있다. 샤를 아즈나부르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만한 감동적인 공연이었다.

파리에는 또한 대형 클래식 공연장이 여러 개 있다. 오페라 거리에 자리 잡은 ‘오페라 가르니에’에서는 발레 등 무용을 중심으로 한 작품들이 소개되고, ‘오페라 바스티유’는 과거 정명훈이 지휘했던 파리 국립 오페라단의 본거지로 다양한 오페라 공연을 즐길 수 있다. 파리 북쪽에 위치한 ‘시테 드 라 파리’에는 필하모니 드 파리 홀이 있다. 특히 파리 오케스트라의 본거지가 될 필하모니 드 파리 홀은 올해 새롭게 개장하여 화제가 되고 있는데, 마침 올해 6월에 아코디언 연주자 리샤르 갈리아노가 탱고 음악의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음악을 들려주는 <피아졸라 포에버> 공연이 열린다고 하여 꼭 한 번 가볼 생각이다.

가끔 서점에 갈 때마다 파리에 관한 여행서들을 살펴보곤 한다. 그 수많은 책들 중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즐길 수 있는 문화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주요 명소와 몇몇 미술관, 백화점, 샤넬과 루이 비통 매장, 레스토랑 소개에만 치우쳐 있는 여행서를 읽고 있으면 무척 안타깝다. 파리를 찾는 많은 여행객들 역시 이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길어야 일홀주일도 안 되는 기간에 에펠탑, 노트르담,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 샹젤리제 거리 등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보고서 생각보다 지저분하고 명품 가방 빼고는 물가가 비싸다며 파리에 대해 실망하는 사람들마저 있을 정도다.

하지만 파리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이 그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관광객의 시선에서 조금 벗어나 찬찬히 주변을 살피다 보면 들라크루아가 벽화를 그린 생쉴피스 교회에서, 발터 벤야민이 산책하던 파사주에서, 에릭 사티가 살던 집이 있는 몽마르트르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묘가 있는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에서, 거리를 걷다 우연히 발견한 전시장이나 공연장에서 ‘나만의 파리’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글쓴이 류진현 1만 장이 넘는 음반과 함께 살고 있는 수집가이자, 사카모토 류이치로부터 ‘too much music lover’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지독한 음악 애호가. 재즈와 월드뮤직, 팝 담당자로 음반사에서 일하고 있다. 2013년 <ECM: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전시회의 자문으로 참여, <ECM Travels: 새로운 음악을 만나다>를 출간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