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못해 먹겠다" 다음의 할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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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노무현 대통령이 고작 석달 만에 의기소침해진 것 같아 안타깝다. "대통령직을 못해 먹겠다"는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쏟은 정성이 배신으로 돌아온다"는 심약(心弱)한 말도 했고 "청와대가 감옥 같다"는 정권 말기쯤의 말도 했다.

취임 후 말도 탈도 많았지만 盧대통령이 잘한 일도 많고 기대를 걸 만한 일도 많았다. 권력기관의 탈(脫)정치선언이나 대통령 자신의 체면손상까지도 감수하면서 권위주의를 씻겠다는 그의 소신은 과거 어느 대통령도 하지 못한 일이다.

최근엔 방미를 통해 주로 그 자신의 입으로 망친 감이 있던 한.미 관계도 상당 수준 회복했다. 내.외정(內外政)에서 이제부터 실력발휘를 할 참이라고 생각되는 시기인데 이런 말이 나왔다.

이번 기회에 왜 盧대통령이 그런 위기감.무력감을 느끼게 됐는지 원인을 살피고 반드시 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 코드 집착이 국정혼란 부채질

필자가 보기에 盧정부의 안정과 성공적 5년을 위해 시급히 할 일은 대충 세가지다. 첫째가 이른바 '노무현 코드'의 탈피다. 지난 석달간 우리는 코드가 맞는다, 안맞는다로 편을 가르고,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공직을 짜고, 코드에 맞는 정책.방침이 시행되는 것을 보았다.

그 결과 盧코드가 법이나 합리성.상식 등과 곳곳에서 충돌하고, 대통령 자신은 장소와 시간에 따라 혹은 코드에 따라 말하고 혹은 법 따라 말하는 바람에 자주 자기모순.혼선을 일으켰다.

그를 곤경에 빠뜨린 물류연대.전교조.한총련.공무원노조 추진세력 등은 한결같이 盧코드에 잘 맞는 지지세력들이다. 그러니까 자기 코드가 자기를 공격해 '못해먹겠다'는 소리가 나오도록 만든 셈이다. 이런 코드에서 벗어나야 함은 당연하다.

이젠 코드 대신 '일'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코드에 맞는 사람이나 정책이 아닌, 일에 맞는 사람, 일이 되게 하는 정책을 찾아야 한다.

두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 문제다. 겨우 석달된 정부에 인사개편을 말하는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지금의 진용과 방식엔 문제가 많다고 본다.

정책혼선.오락가락.아마추어… 따위의 말들이 벌써 盧정부의 특징처럼 나돌고 있다. 정부 내의 이견이나 토론은 좋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정부의 장관이 국무회의가 아닌 데모로 정부 결정을 촉구할까.

새만금 공사를 놓고 농림장관은 공사 계속을 발표하고 환경.해양수산장관은 반대 데모에 참가했다니 콩가루집안 아닌가. 이런 혼선 요소와 아마추어.미달 판명자 등을 빨리 정리해야 한다.

盧대통령에 대한 좀더 강력하고 수준 높은 보필을 위해서도 개편이 필요할 것 같다. 최근 일련의 집단행동에 대한 대응을 보면 정부에 과연 직언.고언이 있는가 하는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지난 석달간 盧대통령의 여러가지 혼선.실수를 보거나 최근 '못해먹겠다'고까지 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가 필요한 적절한 보좌나 충고를 받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최소한의 보좌만 있었더라도 대통령이 그토록 자주 설화(舌禍)를 입지도 않았을 것이다.

*** 대통령 본인의 변화가 급선무

끝으로, 盧대통령 본인의 문제다. 지난 석달을 보면 盧대통령은 아직 대통령직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 '못해먹겠다'는 말부터 대통령답지 않다.

그런 위기감.서운한 느낌이 있더라도 그 말이 미칠 영향을 생각했어야 옳았다. 대통령이 석달도 안돼 '못해먹겠다'고 하면 당연히 국민은 "앞으로 5년을 어떻게 견딜까"하고 걱정하지 않겠는가.

' 입이 가볍다''말이 많다'는 말은 보통사람도 듣기 거북한 말이다. 한두번 그런 소리를 들으면 스스로 달라져야 한다. 비속어(卑俗語) 남발도 대통령직에 대한 인식부족 탓이 아닌가 싶고, 5.18 광주 행사장에서 뒷문으로 들어가고 빠져나간 것 역시 마찬가지다.

개인 노무현은 그걸 참는 것이 인간적 수양일 수도 있으나 대한민국 대통령의 처신이 뒷문 출입일 수는 없다.

부디 깊이 생각하기 바란다. 임기 5년은 개인의 5년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5년이요, 국민의 5년이다. '못해먹겠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도 부디 '잘 해 자셔야'한다.

송진혁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