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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미국 쇠퇴기 … 세계는 다극적 혼돈 피하기 힘들 듯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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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호 18면

자크 아탈리(왼쪽)와 사공일 본사 고문이 프랑스 파리의 아탈리 사무실에서 만나 대담을 하고 있다. [사진 한불네트워크 이순영]

▶사공=당신의 『21세기의 승자(Millenium)』이란 책이 나온 후 1990년대 초에 내가 서울에 초청한 바 있다. 그 책에서 당신이 얘기한 ‘유목적 인간’ ‘유목적 물건’ 등이 오늘날에 상당한 현실로 되고 있어 기쁘겠다. 어쨌든 세계를 내다보는 최근의 당신 생각은 어떤가.

[중앙SUNDAY 창간 8주년 기획] 자크 아탈리와 사공일, 세계 경제를 논하다

▶아탈리=『미래의 물결』에서 밝힌 바 있다. 세계는 앞으로 다섯 단계를 동시 혹은 차례로 거치게 될 것으로 본다. 첫째 단계는 미국의 상대적인 쇠퇴이다. 두 번째 단계는 10~20개국이 공동으로 세계질서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에선 국가의 힘이 아닌 시장의 힘(합법적이든 비합법적이든)이 세계를 이끌 게 될 것이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시장구성원들이 너무 단기적 현상에 매몰된 나머지 큰 혼란과 심지어 큰 전쟁마저 치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 단계에서는 세계가 잘 협력하여 조화로운 세계 질서가 출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 다섯 단계의 첫 단계인 미국의 상대적 쇠퇴의 끝 부분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 미국은 강력하고 아무도 미국을 대체하긴 힘들 것이다. 그 결과 세계질서를 책임질 ‘경찰력’과 ‘법치’가 힘들어 무질서가 확산할 것으로 보인다.

▶사공=당신은 『21세기의 승자』에서 미국의 급격한 쇠퇴로 세계는 다극적 혼돈 속에 놓이게 될 것이며, 만약 미국을 대체할 나라가 나온다면 그것은 비유럽 국가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당신은 일본이 세계 초강대국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있고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아직도 그런 생각에 변함이 없는가.

▶아탈리=나는 그 책을 1991년에 썼다. 그 이후 일본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쳤다. 특히 일본이 외국인 투자와 외국의 영향을 받아들이지 않고 폐쇄적인 게 중요한 문제다.

▶사공=당신은 그 책에서 중국은 아예 언급도 하지 않았다.

▶아탈리=나는 중국이 세계 리더가 될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중국은 단지 지역 차원의 리더는 원하지만 세계 리더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13~14세기나 다른 시기에도 세계 최강국이었지만 유럽이나 아프리카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 않았다.

▶사공=중국이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본다는 말인가.

▶아탈리=그럴 것으로 본다.

▶사공=중국의 힘은 국제무대에서 빠르게 신장하고 있으며, 중국은 과거 2000여 년 동안 자기들이 익숙해진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꿈꾸고 있다고 본다. 다음으로 넘어가자. 당신은 과거에는 일본과 함께 유럽, 특히 동·서유럽이 연결된 유럽이 세계 중심으로 복귀하게 될 것으로 봤다. 일본이 기회를 놓쳤다면 유럽은 어떤가.

▶아탈리=만약 동·서유럽이 광대한 영토와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진 러시아와 연결된다면 큰 잠재력을 갖게 된다. 현재 그렇지 못해 문제다. 앞으로 동·서유럽과 러시아가 연결된다면 유럽은 세계 최강이 될 게 분명하다.

▶사공=나는 얼마 전에 200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에드먼드 펠프스 교수와 대담했다. 펠프스 교수는 아직도 유럽의 ‘조합주의(corporatism)’의 경직성 때문에 미국에 비해 경쟁력 면에서 떨어질 뿐 아니라 유럽은 세계 중심이 될 수 없다고 보고 있더라.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나.

▶아탈리=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은 돈을 마음대로 찍어내는 걸로 연명하는 나라다. 그리고 미국은 절대빈곤층과 잠재실업이 높을 뿐 아니라 정치적인 무질서 등 문제가 심각한 상태에 있다.

▶사공=세계 기축통화체제 문제를 여기서 논의하기에는 복잡한 주제이니 차치하고 유럽의 청년 실업 등 실업문제도 심각한 것 아닌가.

▶아탈리=유럽은 통계적으로 보면 미국보다 낫다.

▶사공=나타난 숫자상 그렇지 않다. 어쨌든 유럽도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개혁강도를 높여야 하는 것 아닌가.

▶아탈리=맞다. 나도 그런 점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작은 디테일에 불과하다. 미국 고용시장은 유연하지만 미래를 위한 시스템은 아니다. 해고한 사람들을 재교육하지 않는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금과옥조는 아니다.

▶사공=당신은 미국이 획기적인 개혁을 하지 않으면 빨리 쇠퇴한다고 주장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개혁을 무엇으로 보나.

▶아탈리=대통령제를 없애야 한다.

▶사공=대안은 무엇인가.

▶아탈리=대통령과 의회가 대화하지 않고 항상 싸우는 현재의 대통령제로는 미래가 없다고 본다. 프랑스처럼 의회와 대통령과 총리 간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미국은 대통령과 의회가 서로 상반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서로 대화도 하지 않는다. 최근 대(對)이란 정책을 놓고 공화당이 대통령과 상의도 없이 이스라엘 총리의 의회 연설을 성사시킨 것은 어이가 없는 일이다. 심지어 공공 채무가 급증해도 대통령은 결정만 할 뿐 정책을 집행할 수가 없다. 굉장히 이상한 시스템이다. 미국은 건강보험이나 초·중등 교육의 문제도 심각하다.

▶사공=그런 측면에서 볼 때 유럽은 어떤가.

▶아탈리=유럽은 진정한 중앙 정부를 가져야 한다. 독립된 재무부와 예산, 그리고 과세 권한이 필요하다.

▶사공=그게 가까운 시일 내에 가능할까.

▶아탈리=나는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가 유로라는 단일 통화를 만들 때도 누구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유럽중앙은행의 양적완화에 대해서도 다들 회의적이었다. 시간이 걸리고 문제가 돌출하겠지만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공=좀더 긴 안목에서 바람직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나.

▶아탈리=10년 전 투자자들이 한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는 평균 기간은 2개월이었다. 지금은 0.5초다. 따라서 주식을 얼마나 오래 보유하는 지에 따라 주주 투표권을 차등화할 필요가 있다. 주식을 오래 보유한 만큼 발언권을 더 주는 것이다. 또 다른 개혁 방안은 상원(上院·Senate) 개혁이다. 미국과 프랑스 등지에는 국회에 상원이 있는데 뭘 하는 곳인지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상원은 미래 세대를 위한 정책을 논의하고 투표하는 곳으로 바꿔야 한다. 오늘의 현안은 아예 다루지 않고 철저하게 미래를 위한 정책만 만든다는 얘기다. 단기적인 목표에 휘둘리는 민주주의와 안정적·장기적인 정책 입안 사이에 훌륭한 타협점이 될 것이다.

▶사공=정말 흥미로운 아이디어로 들린다. 현실화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아탈리=충분히 현실화할 수 있다고 본다. 관건은 이게 전체주의가 다가오기 전에 이뤄질지 전체주의 정권이 속속 들어서고 난 뒤에 이뤄질 지일 뿐이다. 사람들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정부를 공공투자 등을 중시한 첫 번째 케인지언 정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전에 무솔리니, 레닌, 그리고 히틀러가 이끄는 케인지언 정부가 있었다. 좋은 정부는 이런 나쁜 전체주의 광풍 이후에 나타나게 된다. 오늘날 문명 사회의 최대 도전은 어떻게 장기적인 정책 목표를 민주주의라는 다소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통해 구현해 낼 수 있는지 여부다.

▶사공=당신이 말하는 ‘긍정적 사회’를 구현하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아탈리=다음 세대를 생각하고 남을 생각하는 ‘이타주의(altruism)’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남을 도우며 사는 것이 나 자신의 이기적인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에볼라 바이러스가 단적인 예다. 아프리카의 후미진 곳에서 발병했을 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이후에 세계 곳곳으로 퍼지니까 그제야 대책 마련에 나섰지 않느냐. 이타적인 것이 개인 이해관계에 도움이 된다. 따라서 이타주의가 확산하도록 해야 한다.

▶사공=이런 차원에서도 학교교육이 중요하며 교육개혁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아탈리=그렇다. 이타주의를 가르치는 게 기초가 돼야 한다.


아탈리는 1943년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향수를 파는 상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13세 때 파리로 이주, 에콜 폴리테크니크·파리정치대학·국립행정학교(ENA) 등을 졸업했다. 프랑스에선 학력으로만 대통령을 뽑는다면 아탈리가 1등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81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당선되자 90년까지 특별보좌관으로 일하며 정책을 총괄했다. 사공 고문과 만난 건 87년 전두환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였다. 당시 경제수석이던 사공 고문이 미테랑 대통령의 옆방을 쓰던 그에게 ”바쁜데 언제 책을 쓰냐“고 물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 이미 10권이 넘는 책을 낸 저자였다. 아탈리는 “오전 4시부터 6시까지 두 시간 동안 쓴다”고 했다고 한다. 91년 『21세기의 승자(Millenium)』의 발간을 계기로 한국도 첫 방문했다. 그는 그 후 유럽 재건을 돕는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컨설팅 회사 아탈리&아소시에, 플라넷 피낭스를 차례로 설립했다. 2007년엔 사르코지 정부에서 성장촉진위원장으로도 일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현 대통령의 정계 입문을 돕기도 했다. 좌우를 넘나드는 영향력이다. 세계 정세를 읽는 통찰력도 뛰어나 4 반세기 전 디지털 노마드를 예견했다.

파리=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정리=박성우 기자 bla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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