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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탐정 소설에 담은 전쟁의 아픔 … 일본계 영국 작가의 자기 탐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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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민음사
452쪽, 1만4500원

일본계 영국작가인 저자가 2000년 발표한 소설이다. 생소한 독자도 있겠지만 이시구로는 생각보다 우리 곁에 가까이 와 있다. 배우 앤서니 홉킨스가 출연한 영화 ‘남아 있는 나날’이 이시구로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연기한 2010년 SF영화 ‘네버 렛 미 고’도 그렇다. 국내에는 한글 제목 ‘나를 보내지마’를 달고 출간된 그의 여섯 번째 장편의 영화판이다. 1989년 『남아 있는 나날』은 그에게 영연방 최고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안겼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는 1945년 이후 최고의 영국작가 50명을 뽑을 때 그를 32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요컨대 그의 소설은 상품성과 문학성을 두루 갖췄다.

 신간은 그런 이시구로의 면모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우선 탐정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다. 사실주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일부 부자연스러운 대목이 있지만 탐정소설에 으레 등장하는 ‘장르적 관습’이겠거니 여기면, 소설은 매끄럽고 정교하다. 사건의 향방을 예측하기 어렵고 인물의 성격 또한 좌충우돌식이다.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선택적이어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기억의 문제를 건드리는 작품을 꾸준히 써 왔다. [사진 민음사]

 깜짝 놀랄 만한 마지막 반전도 있다. 그러면서도 소설은 가볍지 않다. 단순하게는 개인적인 차원이나 사회·국가 차원에서 선·악의 문제를 건드린다. 선악을 분별하려는 인물의 시선이 자기 내부로 향할 때 이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이시구로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부모를 따라 영국으로 건너갔다. 집안에서의 일본식 교육, 바깥의 영국 세상 사이에 낀 그는 당연히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컸을 것이다. 그래서 일 텐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이 잃어버린 혹은 흐릿한 과거의 기억이 차츰 회복되며 풀리는 과정이 흥미롭게 읽힌다.

 소설은 1930년부터 58년까지 3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져 있다. 하지만 중·일 전쟁이 발발한 1937년, 밖에서는 전쟁이 한창인데도 자족적이면서 퇴폐적이고 그러는 한편 무기력한 생활이 유지되는 국제도시 상하이에서 주인공이 펼치는 몇 달 간의 모험이 소설의 핵심이다. 주인공 크리스토퍼 뱅크스는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민완 사설탐정이다. 그에게는 끔찍한 가족사가 있다. 열 살 무렵, 아편 무역회사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사랑스러운 어머니가 잇따라 실종되자 그가 태어난 상하이를 등지고 이모가 있는 영국에 홀로 보내진다. 부모 실종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이 소설의 뼈대다.

 탐정으로서 뱅크스의 소명의식은 단순하다. 세상의 악을 일소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기껏해야 연쇄 살인범이나 찾아낼 뿐인 탐정의 임무는, 수만 수십 만의 목숨을 앗아가기 일쑤인 전쟁의 참혹함에 견주면 하찮은 게 된다. 이시구로는 졸지에 부모를 잃은 뱅크스의 슬픔이나 상실감을 한사코 드러내지 않는다. 마지막 반전 대목에서 뱅크스의 행동과 눈물을 흘리는 따위 신체적 반응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할 뿐이다. 그런 감정의 절제가 오히려 절절함을 증폭시키는 것 같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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