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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가 꾸민 최정상 무대 디자인 ‘권력의 이동’ 시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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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호 22면

20일부터 25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2015 F/W 서울패션위크의 공식 자료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국내 최정상급 디자이너들의 무대’. 그런데 그 ‘최정상급’에 데뷔 10년이 안 되는 고태용·스티브제이앤요니피·홍혜진이 있다. ‘디자이너 세대 교체’의 단면이다.

25일 막내린 서울패션위크 2015 FW

여기엔 배경이 있다. 일단 ‘제너레이션 넥스트(Generation next, 이하 GN)’의 참가자가 크게 늘었다. GN은 중견 디자이너들에게 참가 자격을 주는 서울컬렉션과 별도로 브랜드를 론칭한 지 1년 이상~5년 미만인 신진들이 무대를 꾸미는 섹션이다. 2년 전만 해도 10개 내외 팀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두 배로 선발을 늘려 세를 과시한다. 신진들의 과감한 추진력도 한 몫 한다. 상급 무대인 서울컬렉션으로 바로 외연을 넓히는데다(서울컬렉션은 브랜드 운영 5년 이상, 혹은 GN 3회 이상 참가자에게 자격이 주어진다) 외국에서 먼저 인정을 받고 바로 국내로 돌아와 브랜드를 알리는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루키 디자이너들이 활약하는 서울패션위크인 셈. 그렇다면 새로운 변화와 가능성은 무엇일까. 행사 기간 중 컬렉션을 통해 그 답을 찾아봤다.

외국에서 이미 알아주는 차세대 디자이너들
물갈이의 조짐은 3~4년 전부터 보였다. 주최 측은 GN 이외에도 GN에 3회 이상 참가한 디자이너들 중 해외 시장에 경쟁력을 지녔다고 판단되는 디자이너들을 ‘패션 테이크 오프’라는 이름으로 묶어 바이어·언론·패션전문가들에게 집중적으로 홍보했다. 최지형·홍혜진·김선호·스티브제이앤요니피 등이 거기에 포함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테이크 오프’는 사라졌지만 이번 패션위크에서는 그 입지를 그대로 물려 받은 이들이 눈에 띄었다. 문수권(권문수), 에스이콜와이지(S=YZ·송유진), 아르케(ARCHE·윤춘호), 제이쿠(J.KOO·구연주), 로우클래식(LOW CLASSIC·이명신), 카이(KYE·계한희) 등에게선 신인티를 막 벗고 말그대로 ‘이륙’하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스타들도 쇼장을 찾으며 열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이번 패션위크에서 이들은 브랜드 색깔을 분명히 하면서도 스토리텔링을 강화한 의상을 선보였다. 매번 독특한 소재를 꺼내드는 문수권은 현대인의 불면증을 옷으로 해석, 오버사이즈 외투와 와이드 팬츠 등 편안해 보이는 디자인을 대거 등장시켰다. 여성스러운 클래식을 추구하는 에스이콜와이지는 향수병을 모티브로 울·퍼·가죽 등의 소재 위에 스팽글, 자수 등을 더해 ‘잔향’을 표현했다. 카이의 경우 매 시즌 사회적 메시지를 옷으로 풍자하는데 이번 시즌에는 트럼프 카드, 토큰, 슬롯머신 엠블럼 등 다양한 이미지를 활용해 요행을 바라며 노력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을 유머스럽게 풀어냈다. 넉넉한 스웨터와 오버사이즈 코트 등을 주 아이템으로 한 유니섹스 캐주얼 룩을 선보였다.

차세대 디자이너들의 공통점은 데뷔 직후부터 급성장하며 국내외 시차를 두지 않고 활동한다는 것. 권문수는 서울패션위크 데뷔 전부터 해외 세일즈에 주력, 피티워모에서는 ‘주목 받는 신예’로 뽑혔던 인물이고, 송유진도 해외에서 브랜드를 론칭한 뒤 갤러리아 백화점 편집매장 ‘스티브 알란’을 통해 역수입 되며 인기를 끈 사례다.

구연주 역시 남편 최진우와 함께 2010년 영국에서 브랜드를 런칭하며 국내외 안팎으로 빠르게 기반을 닦았고, 계한희의 경우 올해 제일모직이 후원하는 삼성패션디자인펀드까지 받은 행운의 주인공이다. 윤춘호는 디자이너 선발 프로그램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2’를 통해 데뷔 전부터 얼굴을 알리기도 했다. 한 마디로 이미 인지도가 높은, 루키 아닌 루키들인 셈이다.

이번 행사 기간 중엔 바이어와 기자뿐 아니라 이들의 가능성에 보다 무게를 두는 이도 나타났다. 글로벌 슈즈 브랜드 캠퍼의 CEO인 미겔 플룩사는 한정판 제품의 컬래버레이션 디자이너를 물색하러 쇼장을 찾았다. 그리고 구연주, 이명신, 계한희를 후보군으로 점찍었다. 그는 “전세계에 있는 끼 많은 디자이너를 찾아 브랜드만의 창조적 네트워크로 만들고 싶다”면서 “한국 젊은 디자이너들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관심을 가졌다”고 밝혔다.

데뷔 5년차 미만이지만 완성도 높은 의상
지난해 봄부터 DDP로 옮겨 온 서울패션위크의 최대 수혜자는 GN 디자이너들이다. 기존 행사장과 달리 DDP에서는 어울림 광장 내 ‘미래로 다리’ 아래로 야외 무대가 마련되기 때문. 티켓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쇼를 볼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하지만 이번 GN은 흥행은 물론 의상의 완성도 면에서도 업그레이된 무대가 눈에 띄게 늘었다. 우선 디자이너 문영희의 아들로 알려진 김무홍의 무홍(MOOHONG)은 안정적인 무대를 이끌었다. 패션과 인문학이라는 소통의 모티브로 삼는 그는 이번 시즌 다문화적 가치를 옷으로 표현했다. 캐시미어·실크·면 등의 다양한 소재를 썼고, 흐르는듯 자연스레 접히고 겹치는 주름들을 특징으로 삼았다. 올 블랙 의상이 대다수였지만 다양한 변주로 지루함 대신 통일성을 주는 의상이었다.

모델 김원중·박주원이 함께 하는 ‘87MM’은 특유의 스트리트 패션 감성을 클래식한 아이템에 녹여냈다. 쿨하고 멋진 ‘너드(NERD·범생이)를 컨셉트로, 티셔츠에 수트 바지를 짝짓는 스타일링을 시도했다. 안감과 겉감을 바꾼 외투 등으로 실험성이 돋보이기도 했다. 신혜영의 ‘분더캄머(WNDERKAMMER)’는 ‘소프트 카리스마’라는 그만의 색깔을 완성시켰다. 현대적인 모던걸을 표현한 이번 시즌 컬렉션은 극적인 단순함으로 오히려 시선을 잡아 끄는 강력함을 선사했다. 베이지·회색·감색 등의 컬러에 울·캐시미어 등 고급스러운 소재를 조화시켜 ‘빼는 미학’의 통일성을 지켜갔다.

SNS로 소통하며 시장 수요 반영하는 게 무기
루키 디자이너들만의 특징과 동력은 무엇일까. 국내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를 주로 취급하는 편집숍 ‘르돔’의 양혜진 디렉터로부터 그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이들 브랜드를 해외에 알리고 있는 인물. 양씨는 신진들의 차별화 포인트를 캐주얼과 스트리트 패션 스타일로 꼽았다. 고급 맞춤복을 위주로 했던 디자이너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이다. 개성이 더 살아날 수 있는 기반이 되는데다 지금의 세계적 트렌드와 맞물린다는 얘기다. 특히 남성복의 경우 공식적인 수트를 위주로 하는 기존 패션위크보다 디자인의 변주를 시도하며 주목받고 있다.

여기에 하나 더. 양씨는 SNS라는 무기를 언급했다. “요즘 디자이너들은 1인 홍보인이자 마케터에요.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으로 자기를 알리는데 적극적이죠. 그래서 선배 디자이너들이 고급 기성복으로 소수의 고객층을 확보하며 활동했다면 시장의 수요를 빠르게 반영하는 디자인을 내놓을 줄 알아요.”

실제 아시아 바이어·기자들 사이에선 이런 이유로 GN에 오른 티백(ti:baeg, 조은애)과 셰희진(Chez HEEZIN, 정희진)이 점수를 얻었다. 싱가포르 패션지 ‘Herworld’의 디지털판 에디터인 니키 부르스 역시 둘을 최고로 꼽았다.

“둘다 파스텔톤 같은 가벼운 컬러들을 대거 등장시킨 것이 인상적이예요. FW시즌임에도 중동·동남아시아를 확실하게 공략하는 신세대만의 영민함이 보여요.”

글 이도은 기자 lee.doeun@joongang.co.kr 사진 서울디자인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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