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일하면 출세’…일본서도 여전한 저녁 없는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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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없는’ 삶은 한국만의 현실은 아니다. 이웃나라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매달 근로 통계 조사에서 풀 타임으로 일하는 정규직 잔업 실태를 조사한 결과, 지난해 잔업 시간은 평균 연 173시간(주당 3시간)으로 나타났다고 닛케이(日經)신문 온라인판이 23일 보도했다. 이는 전년보다 7시간, 20년 전보다는 36시간 늘어난 수치로 관련 통계 작성 이후인 1993년 이후 최장 시간이다.

특히 화물 운송업의 잔업 시간은 연 463시간에 달했다. 자동차 제조업(연 275시간), 정보 서비스업(연 248시간) 등도 잔업이 길었다.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서비스 잔업’, 곧 잔업을 하고도 잔업 수당을 신청하지 못하는 사실상의 잔업까지 포함하면 실상은 더 심할 것으로 보인다.

신문이 꼽은 장시간 노동의 첫 번째 이유는 ‘종신 고용’이다. 일본은 직원을 정년까지 고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매출이 떨어지고 일이 줄어도 직원을 해고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마구치 게이이치로 노동정책연구연수기구의 수석 총괄연구원은 “미국에서는 일거리가 늘면 직원을 늘리고 일거리가 줄면 직원을 줄이는 것이 보통이지만 일본에서는 현재 고용한 직원의 노동 시간을 늘리거나 줄여서 대응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최근 경기가 살아나면서 부족한 일손을 정규직이 잔업을 통해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야마다 히사시 일본종합연구소 조사부장은 “전직의 기회는 부족하기 때문에 회사에서 무리하게 일을 시켜도 쉽게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설명했다.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사람을 좋게 평가하는 일본의 기업 문화도 잔업 시간을 늘리는 또 다른 이유다. 야마모토 이사오 게이오대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오래 남아 일하는 사람일수록 출세하는 경향이 있었다. 과장 승진을 앞둔 대졸 사원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주당 노동 시간이 10시간 늘어날 때마다 이듬해에 과장으로 승진할 확률은 3%씩 높아졌다.

야마모토 교수는 “유럽에서는 오래 일하는 사람은 생산성이 낮은 사람으로 취급 받지만 일본에서는 긍정적으로 여겨진다”고 지적했다. 내각부의 최근 조사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는 사람의 절반 이상이 “상사는 잔업 하는 부하 직원을 좋게 평가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일본에서는 주로 팀 단위로 일이 이뤄지는 것도 잔업 시간이 길어지는 이유다. 야마모토 교수는 “일본은 직원당 업무의 범위가 애매하기 때문에 생산성이 높은 사람에게 일이 모이기 쉽다”고 말했다. 자기 일이 끝나면 집으로 가는 서구 사회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팀 단위로 일이 진행되기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이 자기 일을 빨리 끝마쳐도 팀의 다른 일을 처리하다가 퇴근이 늦어진다는 설명이다.

이런 관행을 없애기 위해 기업마다 변화를 시도하고는 있다. 이토추(伊藤忠) 상사는 2013년 가을부터 일본 내에서 일하는 정규직 2600명을 대상으로 새벽 근무 촉진 제도를 도입했다. 오후 8시 이후 초과 근무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오전 8시까지 시간 외 근무 수당을 20% 늘렸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직원들을 위해서 주먹밥 등 간식을 무료로 내놓고 있다.

그 결과 종합 일반직의 초과 근무 시간은 월 45시간으로 제도 도입 이전보다 4시간 줄었다. 회사 측은 “늦게까지 남아서 일하는 밤보다 아침에 더 효율적으로 일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오전 시간 외 근무 수당을 늘렸지만 간식 비용을 합쳐도 회사의 비용은 전체적으로 4% 줄었다.

일본 정부도 장시간 노동 관행을 바꾸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먼저, 일하는 시간과 일의 범위를 제한하는 ‘한정 정사원’ 제도를 기업이 도입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이 제도가 보편화되면 정해진 시간에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돼 그간 잔업으로 불가능했던 육아가 쉬워질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강제 휴가 제도도 도입할 방침이다. 지금까지는 직원이 유급 휴가를 회사에 신청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용이 어려웠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정규직의 16%가 1년에 단 하루의 유급 휴가도 이용하지 않았다. 2016년 봄부터는 연 5일간의 유급휴가를 직원들이 모두 이용할 수 있도록 기업에 의무화할 방침이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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