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프로기사 꿈꾸는 17세 이어덕둥의 하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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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칠흑 같은 방에 갑자기 형광등이 켜진다. 연구생 기숙사에서 같이 사는 김기백 형이다. 형은 새벽 6시면 어김없이 방마다 불을 켜며 연구생들을 깨운다. 천근 같은 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다시 눈이 감기려는 찰나 어제 있었던 연구생 리그가 머리를 스친다. 아깝게 진 대국이었다. 벌떡 일어나 바둑판 앞에 앉아 처음부터 돌을 놓아본다. 그땐 왜 이걸 몰랐을까. 뒷맛이 씁쓸하다.

나는 바둑 프로기사를 꿈꾸는 이어덕둥(17)이다. 원래 이름은 ‘이어덕’이었지만, 막둥이인 나를 유난히 예뻐하신 할머니가 이름 끝에 ‘둥’ 자를 넣으셨다. 나는 11년 전 이맘때 바둑을 알게 됐다. 여섯 살이던 2004년 3월, 바둑을 좋아하시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동네 바둑 학원에 가게 된 거다.

처음 집어든 흑돌과 백돌의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바둑 학원으로 달려가 종일 시간을 보냈다. 2~3년 뒤 광주에는 내 적수가 되는 또래가 없었다.

2008년 1월 5일, 부푼 꿈을 안고 서울에 왔다. 난생 처음 부모님과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장수영 바둑도장에 다니다 2012년 8월 14일 지금 다니는 양천대일 바둑도장에 입문했다. 도장을 옮기며 휴대전화도 없애버렸다. 바둑 도장으로 향하는 버스에 타고 있으면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있다. 교복을 입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또래 아이들의 모습이다.

오전 9시 도장에 도착하면 치열한 하루가 시작된다. 먼저, 자율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연구생, 도장 출신 프로기사와 바둑을 둔다. 오늘은 이동휘 초단과 맞붙어 불계승을 거뒀다. 불리한 바둑이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막판에 상대의 패착이 나와 역전할 수 있었다. 저녁에는 사활 문제를 풀고, 중국의 창하오 9단 대 구링이 5단의 기보를 연구했다. 저녁 9시 반, 드디어 바둑 도장에서의 하루가 끝난다.

이때부터는 내게도 조금의 여유가 허락된다. 보통은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연구생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며 꿀맛 같은 야식을 사먹는다. 넉넉히 배가 불러오면 덩달아 기분도 좋아진다. 이대로 잠들고 싶지만 마지막으로 아쉬웠던 부분을 한번 더 살펴본다. 밤 12시가 가까워지면 드디어 포근한 이불 속으로 몸을 누인다. 24시간 중 제일 행복한 순간이다.

쏟아지는 잠을 밀어내며 오늘을 돌아본다. 이내 조금만 더 열심히 할 걸 하는 아쉬움이 떠오른다. 2011년부터 일곱 번의 입단대회에서 고배를 맛봤다. 1월에는 친한 친구 송지훈까지 입단하면서 불안감이 더 커졌다. 나도 내년 1월이면 연구생 입단대회에 나가 프로기사가 될 수 있겠지. 취약점인 포석만 잘 보완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내게는 실패를 두려워 않는 배짱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뒷심이 있다.

입단한 다음에는 뭘 할까. 수백 번 그려봤지만 여전히 달콤한 상상이다. 입단하면 영화관에서 최신 영화를 마음껏 보고 수영, 외국어도 배워야지. 무엇보다 세계대회 본선에 나가 보란듯이 정장을 입고 명승부를 펼칠 거다. 멋진 내 모습이 생중계되면 광주에 계신 부모님도 나를 TV로 보실 수 있겠지. 입단만 하면, 입단만 하면…. 부풀어오르는 마음을 꾹꾹 누르며 두 눈을 감는다.

※프로기사 입단을 준비하는 연구생의 하루를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풀어본 기사입니다. 연구생 이어덕둥(17)을 만나 인터뷰하고 취재한 내용을 토대로 그의 하루를 재구성했습니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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