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희기자의맛따라기] 고기 값이 왜 이리 착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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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살아 있다. 끊임없이 변한다. 정해진 원칙은 없다. 시대와 상황에 조응하면서 긴 강이 흐르듯 변천한다. 낱말 형태가 조금씩 진화하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 한 낱말의 뜻이 180도 달라지기도 한다.

'팔다'와 '사다'의 주객전도는 놀랍다. 곡물에 쓰이면 정반대 뜻이 된다. 팔다=buy, 사다=sell. 돈 주고 쌀을 구입하면 '쌀 판다' 하고, 쌀을 돈과 바꾸면 '쌀 내서 돈 산다'고 한다. 노천명의 시 '장날'의 첫 행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에서 그 쓰임을 본다. 점차 잊혀져 가는 말이지만 농촌 어른들은 실생활에서 쓰는 표현이다.

구한말 서울에 와서 정세를 살피던 러시아 정보장교도 이런 사실을 본국에 보고했다. 신기하기도 하고 헷갈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화폐보다 곡물이 경제적 교환 기준으로 더 중요하기 때문인 것 같다는 나름의 설명도 덧붙였다.

물물교환 농경시대에서 자본주의 화폐경제로 넘어오면서 두 낱말이 벌인 세력다툼의 흔적을 품은 화석(化石)어휘라 할 만하다. 다툼 끝에 서로 자리를 맞바꿨지만 곡물의 경우에는 원래의 쓰임을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인터넷에서 쓰이는 새로운 표현이 있다. '착한 가격'이라는 말이다. 2~3년쯤 된 듯하다. 품질에 비해 값이 쌀 때 감탄을 담아 쓴다. '착하다'는 본래 마음씨나 행동이 바르고 어질다는 의미의 형용사다.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그런데 착한 가격이라니…. 윤리의 시대와 자본의 시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또 하나의 '말싸움'인 듯 보인다.

최근에는 '착한고기'가 등장했다. 이 집 고기맛 아는 사람들끼리는 인터넷에서 이미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착한고기'는 시골 외딴집 정육점이다. 고기를 사면 앞마당에서 구워 먹을 수 있다. 김치.상추.풋고추.마늘.쌈장.기름소금과 참숯불을 자리에 준비해 주는데 1인당 3000원(초등학생 1500원). 구워 먹을 새송이버섯, 몇 가지 술, 진공포장 밥도 판매한다.

또 고기와 생선구이를 제외한 먹거리는 무엇이든 싸 가지고 가도 된다. 소풍 가는 기분으로 과일.파무침.밥이나 국물류를 준비해 가면 좋다. 은박지로 싼 감자나 고구마를 준비해 숯불에 넣어 뒀다가 후식으로 먹는 맛도 그만이다.

특상등심이나 안창 같은 한우고기 최고급이 600g에 3만5000원. 돼지고기는 항정살.갈매기살.가브리살이 1만원씩, 삼겹살은 8400원. 4인 가족이 안창.항정살을 한 근씩 먹으면 5만7000원이 든다. 주인은 "고기 값이 시내 정육점보다 20%쯤 싸다"고 했다. 이쯤 되면 고기지만 착해 보일 법도 하다. 그래서 고기를 구워 먹은 사람들은 대부분 몇 근씩 사 가지고 간다. 고기는 얼리지 않은 냉장육이다. 진공포장해 주기 때문에 냉장고에 두면 열흘은 신선도가 유지된다.

소 100마리 분을 넣을 수 있는 숙성용 냉장고를 갖춘 이 집에서 1주일에 소 10마리 분의 고기가 팔려나간다. 지난해 8월 개업해 16개월밖에 안 됐지만 주말에는 손님이 700~800명 몰린다. 비닐 막을 치기는 했지만 반 야외에서 고기를 굽는 셈이니 옷을 든든히 입고 가는 게 좋다.

이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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