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나무] 글자없는 그림책 … "뭘 읽어주냐고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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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아이에게 그림책 한 권을 건네 봅니다. 아이의 호기심 어린 눈빛은 곧 의문의 눈빛으로 바뀌는군요.

"엄마, 이게 뭐야? 글자가 없잖아!"

아이가 이렇게 물어본다고 해서 당황할 것 없어요. 이제부터 상상의 세계로 넘나들 수 있는 문 앞에 와있는 것이니까요. 그림책은 아이들이 혼자 보게 하는 책이 아니라 어른들이 읽어줘야 하는 책이라는 것쯤은 이제 상식!

그러나 아무런 글자가 없는 그림책이라고 하면 사정은 조금 달라지겠죠. 아무런 글자가 없는데 대체 뭘 읽어줘야 하는 거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곧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이니까요.

'눈사람 아저씨'(마루벌)는 글자 없는 그림책의 고전이에요. 이 책이 아이 어른 가릴 것 없이 깊은 인상을 남긴 까닭은 상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가슴 한쪽이 몹시 아려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넘나들며 전개된 덕분에 과연 이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어 멍해져 버리고 마는 것이죠.

그런가 하면 액자형식을 취하고 있는 '나의 빨강 책'(아이즐.그림)은 공간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도시와 섬에 사는 아이가 책을 통해 만나게 되는데, 이 책이 또 다른 곳에 사는 아이 손에 들어감으로 이야기는 끝이 없이 이어집니다.

'구름공항'(중앙출판사)은 상상력이 단연 돋보입니다. 초현실주의 화풍에 영향받은 까닭에, 즉 현실세계와 상상의 세계를 같이 버무려놓은 때문인지 보는 사람들을 굉장히 헷갈리게 해요. 거짓말로 보자니 묘사가 너무 사실적이고, 그렇다고 해도 그려놓은 세계는 그야말로 허무맹랑하다 이거에요. 그러니 별별 생각을 다 끌어내게 하고, 현실세계의 질서를 깨는 파장을 일으키는 겁니다.

'노란 우산'(재미마주)의 경우는 조금 달라요. 이야기성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상력이 마구 꿈틀거리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책은 빗방울 튀는 음악과 같은 리듬감과 색감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책과 음악의 어울림을 시도한 것도 독특하고요.

글자 없는 그림책은 시시할 수도 있고, 보면 볼수록 더 재미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독자들의 상상력에 달려있습니다. 저런! 상상력이 메말라 버렸나요?

그렇다면 안노 미쯔마사의 '여행 그림책'(한림)을 펼쳐놓고 아이와 함께 숨은그림 찾기 여행을 떠나봅시다. 앞서 소개한 책들이 이야기성이 강하다면, 이 책들 속에는 다른 책의 주인공들이나 명화의 한 장면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아는 만큼 볼 수 있는 책'이란 점이 새롭습니다. 따라서 글자가 없더라도 얼마든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죠.

글자 없는 그림책을 읽어주는 방법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아이와 엄마가 등장인물의 역할을 나누어 맡아 말을 주고받을 수 있겠고, 또는 새로운 이야기를 꾸며나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답이 없는 문제를 푸는 일이 그렇듯, '내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 했던가요? 글자 없는 그림책의 결론은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허은순 (동화작가, 어린이책 사이트 '애기똥풀의 집'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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