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관습과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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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가정의례준칙이 정부와 여당에 의해 개정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법률이나 규칙이란 만고불변의 절대성을 지닌 것이 아니고 시대와 상황의 변화와 여건의 상대에 따라 신축자재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할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현실적인 괴리를 빚고 그로 말미암아 이를 지켜야할 사람들이 오히려 외면하고 피해 가는 풍로가 생긴다면 그 법규의 존립자체가 공허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이미 그 내용 일부가 국민들의 무시와 외면을 받아온 가정의례준칙의 개정 문제가 거론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정의례준칙이라 부르는 이 법규가 생긴 것은 지난 73년 3월 유신비상입법에 의해서였다. 1인당 GNP가 4백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던 당시의 국민생활 수준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허위허식이 우리민족 고유의 풍습과 관례로 강제되고 있었고 일부 부유층의 사치가 가세하여 「뱁새」가 「황새」 흉내를 내야하는 불 합리가 없지 않았다.
이러한 허례와 사치풍조의 파급 효과를 없애고 지나치게 복잡하고 낭비적인 혼·상·제례를 간소하고 현실적으로 바꿀 수 있었음을 이 법규가 가져온 공적으로 평가하는데 인색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 법규가 국민들과 갈등을 빚어온 것은 국민의 생활관습으로 누 천년에 걸쳐 몸에 배어있는 전통과 양속을 획일적으로 법률에 의해 묵어버리겠다는 법률 만능의 사고방식에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복을 간소화하고 탈상기간을 단축하며 고지서처럼 남발되던 결혼 청첩장의 배포에 제동을 걸고, 어려운 제사 축문을 한글로 고친 것 등을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러나 평생에 한번 있는 결혼식이나 회갑연에서 찾아온 축하객을 정성껏 맞이하고 따뜻한 점심한끼 대접해 보내겠다는 우리고유의 아름다운 예절까지를 법률로 다스리겠다는 것은 행정력의 과신이요 오만이다.
또 이 법규의 모순은 이 법규가 시행되어 온 이후로도 일부 특수 부유층이나 특권층의 호화·사치풍조가 근절되지 않았으며, 최근에는 억대를 넘는 토지·아파트·자가용 혼수까지 거래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또 결혼식 피로연이 예식장 주변 음식점에서 공공연히 베풀어지고 있고, 음식점 회갑연도 일반화해 있다. 법규 자체의 존립이 웃음거리가 돼버린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제 12년 동안의 시행착오 경험을 토대로 이 법규는 크게 손질해야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개인 소득 2천 달러에 걸 맞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관혼상제의 의례는 국민의 일반적인 상식과 양식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각 가정은 가문으로부터 내려오는 고유의 전통이 있고 풍습을 갖는다. 그들이 갖는 고유성을 살리면서 스스로 시대에 맞게 개선해 나가는 것은 바로 전통 문화의 발전적 계승이란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 세대가 이어지면서 그들 스스로 알맞은 의례를 터득하고 정립하도록 해야할 것이다. 법률이 여기에 끼어 들어 불편한 역할을 떠맡을 필요는 없다.
법이 다스릴 일은 따로 있다. 밑도 끝도 없는 호화혼수는 이를 견제할 제도적 장치가 발동되면 그만이다. 호화 풍조는 사회 분위기의 전반적인 검소화로 점진적인 개선을 유도하면 될 것이다. 여기에는 특히 사회 지도층의 각성과 수범이 절대적인 비중을 갖는다.
현재 자라나고 있는 세대들에 대한 교육도 중요하다. 허식을 배제하고 검소한 의식과 예절을 교육하는 것은 가까운 장래를 맡을 이들의 가치관을 올바르게 세워주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의례와 풍습마저 법의 규제에 의해 통제돼야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국민 모두가 건전한 양식과 검소한 생활자세를 갖는다면 의례 법규 따위는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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