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25. 값진 권투 은메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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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필자左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울에서 걸려온 축하전화를 받고 있는 정신조 선수.

권투 밴텀급 결승전이 열린 1964년 10월 28일 오후 7시25분. 도쿄 고라쿠엔 아이스 팰리스의 관중석에 앉아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잃었다. 손에 잡힐 듯하던 금메달의 꿈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죄송합니다"며 흐느끼는 정신조 선수의 등을 두드리며 나는 "은메달만 해도 장하다"고 격려했다. 그러나 내 가슴 속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정 선수는 일본의 사쿠라이 다카오에게 RSC로 졌다.

정 선수가 승승장구해 결승에 올랐을 때 나는 이번에야말로 올림픽 첫 금메달을 따낼 기회라고 느꼈다. 정 선수는 1회전에서 통일아랍공화국(현 이집트.시리아)의 파락, 2회전에서 아르헨티나의 알루마라스를 물리쳤다. 3회전 상대인 쿠바의 에스피노사에게 기권승, 준결승에 올라서는 멕시코의 멘도사를 판정으로 제압했다. 분위기가 좋았고 경기 내용도 훌륭해 기대를 걸 만했다. 그러나 결승에 오르기까지 격전을 거듭한 정 선수는 심각한 부상을 숨기고 있었다.

정 선수는 1회전 경기를 치르다가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부러졌다. 남은 경기를 포기해야 할 만큼 큰 부상이었다. 그러나 코칭스태프는 정 선수의 부상 사실을 숨겼다. 정 선수는 재일동포 한의사가 놓아주는 침을 맞으며 경기를 거듭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결승전이 열리는 날 한의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고통이 심해지자 정 선수는 손에 마취 주사를 맞고 출전했다. 공이 울리고 사쿠라이와 마주 선 정 선수는 현기증을 느꼈다. 테크니션으로 유명한 정 선수였지만 판정까지 갈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속전속결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너무 서두르다 빈틈을 보였고, 사쿠라이의 반격에 쓰러지고 말았다. 사쿠라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나기 펀치를 날려 정 선수를 그로기 상태에 빠뜨렸다. 결국 정 선수는 4분30초 동안 네 차례나 다운을 당했다. 정상적인 경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심판은 2라운드 들어 정 선수가 두 번째 다운을 당하자 경기를 중단시켰다.

그가 패한 뒤 그를 둘러싼 소문이 무성했다. 정 선수가 결승을 앞두고 외박을 했으며 모 언론사에서 단독 인터뷰를 위해 그를 숙소에 들여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지만 이 같은 소문은 모두 사실이었다. 일에 대한 기자들의 열의는 예나 지금이나 극성스러울 정도로 대단했다.

사쿠라이와의 결승전은 당시 조간신문 마감 시간에 열렸다. 그래서 서울의 몇몇 신문사에서는 '정신조 우승'과 '아깝게 은메달'이라는 제목으로 미리 신문을 만들어 놓고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결국 1면 톱으로 '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 획득'이라는 기사를 실은 신문은 모두 불태워졌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 선수의 경기를 보기 위해 부산까지 갔다고 한다. 당시 부산에서는 일본의 텔레비전 중계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나의 마음은 너무 아팠다. 온 국민의 성원과 기대를 외면한 패군지장의 심정을 필설로 표현하기 어렵다.

정 선수를 뒤에서 도운 분이 여럿 있다. 그가 고명상고에 재학 중일 때 전병온 이사장은 학비를 전액 면제해 주고 코치까지 초빙해 책상을 치운 교실에서 훈련하게 했다. 유망주 시절 정 선수를 개인지도한 고봉아씨도 빠뜨릴 수 없다. 도쿄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세상을 떠난 그는 운명하는 순간까지 "신조가 메달 따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죽다니…"하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도쿄올림픽과 관련해 레슬링 은메달리스트 장창선 선수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그가 세계선수권대회를 제패했을 때의 즐거운 회상 장면에 담으려 한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 바로잡습니다

11월 25일자 28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제116화)에 당시 '고명상고 김병온 이사장'은 '전병온 이사장'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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