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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해교란 순교자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조정의 기해교란 천주교 박해를 당당히 공박한 「상재상서」.
한국친주교인 51명과 프랑스 사제 3명이 헌수·옥사의 순교를 한 기해교난(l839년). 이들 순교자들은 1925년 모두 복자로 시복됐고 오는 5월초 천주교 최고 품위인 성인품에 전부 오른다.
기해교난. 한국인 순교자들은 역사적인 한국천주교회 1백3위 시성에서 성인품의 영광과 함께 시성순위 제2번부터를 차지하는 또하나의 영광을 더해 갖고 있다. 제2순위부터 제13순위까지의 기해교난순교자는 정하양(바울로) 이호영(베드로) 정군보(쁘로따시오) 이광묵(아우구스띠노) 남명혁(다미아노) 권득인(베드로) 김아지(막달레나) 박아지(안나) 이소사(아가타) 김업이(아가타) 한아지(바르바라) 박희순(루치아)
신분별로는 ▲과부=4 ▲신도회장=3 ▲상인=2 ▲신학생·궁녀·부인=각1명이다. 연령은 30대중반부터 60대중반까지.
특히 기해년 5월24일 서울 서소문밖 형장에서 동시참수된 성인9위(남3·여6)의 굳건한 신앙심과 고문을 이겨낸 의연한 자세는 한국천주교 순교사의 장한 한 페이지로 손꼽힌다.
기해교난의 원인은 한마디로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간의 세도정치 다툼에서 비롯됐다. 조씨측은 순조때부터 시작된 김씨 세도를 몰아내기 위한 술책의 하나로 천주교 박해를 이용했다.
물론 주자학(유교)을 통치이념으로 한 조선왕조가 「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를 선뜻 받아들일수 없던 국가적 배경도 박해의 근본원인이었다. 어쨌든 천주교에 관대한 편이였던 안동김씨측의 김대왕대비 수렴청정을 넘어뜨리기 위한 조씨측의 술책은 1839년3월 우의정 이지연을 책동, 주청케하여 김대비의 천주교 박멸령을 내리게 했고 그해 10월에는 천주교 탄압의 척사륜음을 발표했다.
원래 임금의 새해 권농교시인 척사윤음이 천주교박해에까지 원용된 것은 형조판서 조인영의 책동이었다. 김대비의 이름으로 발표된 척사윤음은 조정의 천주교탄압 명령을 비판해 올린 정하양의 「상재상서」에 대한 공박이기도 했다.
시성순위 제3위인 이베드로는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과부인 누님 이아가타와 서울에 올라와 세례교인이 됐고 문막(원주)으로 이사, 돈독한 신앙생활을 했다.
1835년2월 누님과 함께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후 4년동안의 옥고끝에 36세의 나이로 1838년 11월 옥사했다. 옥졸들은 그가 갖은 고문에 끝내 숨을 거두자 손과 발을 자른후 거적으로 말아다 성문밖에 버렸다.
이베드로는 부중에서 자신의 재판광경을 쓴 편지를 「모방」신부(프랑스)에게 보내 당시의 천주교 박해를 실증하는 중요자료로 전해지고 있다.
정바울로성인은 양반집의 후예다. 범 「앵베른」주교가 신부로 양성키 위해 라틴어·불어 등을 가르치며 크게 신임했다.
1839년 7월 옥중에서 호교논인 「상재상서」를 써서 포장에게 전달, 조정에까지 올라갔다.
그는 그해 9월 서소문밖에서 45세의 나이로 참수당했고 뒤이어 11월에는 그의 어머니 이소사(세실리아)도 옥사, 순교했다.
기해년 서소문밖 동시참수9위 성인중 특히 6명의 여교우는 가냘픈 여인의 몸이지만 혹독한 고문을 끝내 이겨내며 형장의 마지막 순간까지 천주를 찬양, 불굴의 신앙의지를 보였다.
박루치아는 김대왕대비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궁녀-.
천주교에 입교한후 건강을 이유로 궁중을 나와 조카가족들과 언니를 입교시키고 옥중에서도 죄수들에게 천주교리를 열심히 가르쳤다. 기해년 39세로 참수당해 순교했다.
기해교난은 명예와 돈에 눈이 어두워 배구자가 된 김순성의 천주교인 색출협력 등으로 지도자적 입장의 교인들이 거의 샅샅이 잡혀 순교했다.
순교자들간에는 가족·친척관계 등의 얽힘이 많은게 특징이다.
기해년 당시의 국세는 총인구 6백68만4천1백91명(가구수 1백57만7천1백호)에 천주교인 9천여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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