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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의 토이 스토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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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호 16면

나의 오래된 친구를 소개하는 기획 전시 ‘마이 토이’. 키오스크를 통해 전시품의 상세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미디어 파사드 기법으로 꾸며진 외관.

피규어 매니어들의 눈이 번쩍 뜨일 만한 곳이 등장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청담동에 문을 연 ‘피규어뮤지엄W’이다. LED 모듈로 건물 3면을 둘러싼 기하학적인 모양새는 지나가는 사람도 문득 쳐다보게 만든다. 해가 지면 표면에 각종 캐릭터가 미디어 파사드(건물 외벽에 LED 조명을 비춰 영상을 표현하는 기법)로 등장하면서 건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피규어’가 된다.

청담동에 개관한 ‘피규어뮤지엄W’

피규어의 사전적 정의는 ‘관절이 움직여 다양한 동작을 표현할 수 있는 모형 장난감’이다. 하지만 홍콩의 핫토이 등 캐릭터의 정밀한 재현을 보고 있노라면 장난감이라는 호칭이 미안할 정도다. 만화ㆍ영화에서 파생된 전통 피규어 뿐만 아니라 곰인형을 차용한 베어브릭 등 패션 아이템까지 그 영역을 넓혀가면서 일부 키덜트족만이 아닌 어른들의 장난감이라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다. 일부 식당과 카페를 중심으로 전시되던 피규어들이 번듯한 박물관을 갖게 되는 것도 이런 연유일 터다.

지상 6층, 지하 2층으로 구성된 850㎡의 공간은 넓지는 않지만 알차게 꾸며져 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희귀본부터 현재 매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보급판까지 8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특별한 즐거움을 위해 뭉친 유병수(47) 대표이사와 임정훈(47) 공동대표를 3일 전시장에서 만났다.

이들의 인연은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정초등학교 동창인 이들은 어릴 적부터 피규어에 푹 빠져 있었다. 임 대표는 “아버지가 일본 출장을 다녀오실 때면 피규어를 사다주시곤 했다”며 “어렸을 땐 누구나 장난감을 좋아하지만 어느 순간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기억을 이어오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누구나 창고에 처박아 두었던 장난감과 마주하는 ‘토이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5~6층에 마련된 기획 전시 ‘마이 토이’(My Toy)는 이 같은 맥락에서 출발했다. 나의 오래된 친구, 특별한 나의 히어로를 소개한다는 컨셉트다. 유 대표의 히어로인 아이언맨과 임 대표의 건담 외에도 다양한 영웅을 만나볼 수 있다. 영화 ‘에일리언’과 ‘트랜스포머’에서 실제 사용됐던 무기 소품 외에 팀 버튼 감독의 영화 ‘배트맨(1989)’에 등장했던 오리지널 배트모빌도 눈에 띈다.

단연 돋보이는 것은 건담 RX-93V. 유명 원형사가 한땀 한땀 빚어낸 2억원대의 명품이다. 유 대표는 “피규어도 미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비싼 가격은 아니다”라며 “당시에는 비교적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희소성을 갖게 되고 누가 만들고 어떤 에디션인가 따라 소장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오는 7월 첫 전시를 마치면, 하반기에는 ‘올드 토이’(Old Toy) 기획 전시를 선보일 예정이다.

지하에는 아이들과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놀이공간이 마련돼 있다.

광고 감독 출신(유 대표)과 방송국 미술감독 출신(임 대표)답게 공간 연출에도 각별한 공을 기울였다. 새롭게 조성한 외벽 때문에 생겨난 경사진 공간은 키오스크로 활용했다. 얼핏 보면 40여 개의 피규어가 무의미하게 나열돼 있는 듯 하지만 하단에 마련된 터치스크린을 누르면 크기는 물론 어느 제조사에서 어떤 아티스트가 만들었는지까지 상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임 대표는 “사실 피규어는 일반인들에게 굉장히 어려운 전시일 수 있다”고 고백했다. 매니어들은 큐레이터보다 더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기에 일일이 설명하는 것 자체가 모독일 수 있지만,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면 이게 왜 중요하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짐작하기 쉽지 않은 탓이다.

3~4층에 마련된 상설 전시실은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수퍼 히어로 존은 1951년에 출시된 아톰을 시작으로 철인 28호ㆍ마징가Zㆍ건담ㆍ파이브스타스토리즈(FSS)를 거쳐 95년 에반게리온에 이르기까지 연대기별로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성수동에 대형 수장고까지 마련한 이들이지만 살짝 연배가 높은 아톰 시리즈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 대표는 “아톰 매니어인 배우 조민기씨에게 취지를 설명하니 흔쾌히 대여를 허락해주셨다”며 “앞으로도 테마에 따라 다양한 컬렉터들의 수집품을 함께 만나볼 수 있도록 전시를 구성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피규어뮤지엄W’의 임정훈 공동대표·유병수 대표이사·양유정 관장

피규어가 좋아 박물관까지 세운 이들의 다음 스텝은 뭘까. 유 대표는 “우선은 일반인들과 매니어층 양쪽으로부터 인정받는 ‘한국 피규어의 성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유명한 피규어 제조사에도 한국인 원형사가 많다고 들었다”며 언젠가 직접 피규어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다. 이에 임 대표는 “한국도 뽀로로처럼 각광받는 캐릭터가 많았지만 ‘반짝’하고 사라진 아이돌 스타 같은 측면이 있다”며 “캐릭터 사업에 대한 체계적 지원과 계획이 있어야 일본의 산요처럼 시대가 지나도 굳건한 생명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함께 공간을 기획해온 양유정(44) 관장은 “일본에 코믹북이 있다면 한국은 최근 뜨고 있는 웹툰이 무궁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망했다. “그런 의미에서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더욱 중요합니다. 오리지널 작품이 가진 예술성과 피규어에 투영된 기술, 관객의 감성이 어우러져 아빠의 꿈이 아이의 꿈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져야 하거든요.”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카페와 피규어샵을 무료 개방하는 것 역시 이같은 희망에서다. 이들은 이름에 ‘W’라고 붙인 이유를 끝내 말하지 않았다. 감탄사 ‘와우’(Wow)가 되든 피규어 ‘월드’(World)가 되든 관람객의 선택에 맡기고 싶다고 했다. 과연 이들은 ‘원더풀’(Wondeful)한 박물관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경직된 전시는 하지 않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고 관객과 함께 다듬어 간다면 그 역시 의미있는 행보가 될 듯 하다.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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