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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목천장흥 마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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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마씨는 우리나라 토착의 성씨다. 마씨가의 족보는 그 역사를 아득히 2천여년을 거슬러 삼한시대로까지 오른다.
마한의 첫 임금이「마겸」이며 그가 바로 우리나라 마씨의 비조라는 것이다.
일설에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토벌할 때 끝까지 저항했던 목천 (현천원군)고장 사람들에게 우·마·상·신·돈을 짐승이름을 성으로 쓰게한 것이 마씨의 시원이라고 하나 그보다 아득한 옛날 부여·고구려시절에 우가·마가·저가등 성이 이미 있었다는 사서의 기록으로 보더라도 이는 후세의 와전이라는 것이 마씨들의 주장이다. 우·마등 짐승이름이 성으로 된 것은 고대사회에서의 토템사상과 관련이 있다는 풀이다.

<마한 첫 임금이 비조>
마씨들은 아득한 예전 조상의 기록은 잃어버려「마겸」이후 세계를 헤아리지 못한다. 다시 긴 세월을 내려와 백제건국의 공신 마려를 시조로 받든다. 그는 백제창건과 온조의 심복참모로서 고구려에서부터 온저를 따라 남으로 내려와 한강변에 백제국을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오간등「10명의 공신」(10신) 가운데도 으뜸이어서 좌보의 벼슬을 지냈다한다.
그러나 그 이후 마씨가의 역사는 다시 계보가 끊겼다.
마씨가의 현재 세계가 출발하는 원점은 마륙항. 증시조로 받든다. 그는 백제가 망할 무렵 사람으로 의자왕이 항복하자 성거산 (충남 직산) 을 근거지로 나·당 연합군에 항전하며 백제부흥운동을 폈던 의열한.

<전국에 3만여명>
백제의 건국공신을 자처하는 마씨집안의 역사가 7백여년 백제왕조 내내 공백인 것은 우리나라 대부분 성씨 상대역사의 공통되는 헛점이면서 철저히 파괴되고 인멸된「동양의 로마」백제역사의 비극일 것도 같다.
아뭏든 마씨는 마륙항으로부터 세계를 이어 40여세를 내려온다.
륙항의 9대손에서 목천과 장흥으로 분관한다. 고려 문종때 이부상서 마점중의 두 아들인 이들 중 형인 현(예빈전태학사) 은 세거해오던 목천을 본관으로, 동생 혁인 (개성윤) 은 장흥을 식읍으로 받아 후손들이 본관을 장흥으로 쓰게됐다.
오늘에 전국의 마씨는 3만여명, 성별인구순위 71위. 작은집인 장오족이 더 융성한 편이다.

<천목은 태종의 막료>
고려조의 마씨인물로는 마천린 (문충공·예부시랑·대호군)과 그의 아들 경수 (문하시랑평장사), 마희원 (문하시중평장사) 과 그의 아들 중기 (한림학사·승지), 중기의 증손 수손(문하시중평장사) 등이 두드러진다.
목천파에서는 경수가 려말무인들의 발호를 견제하다 미움을 받아 귀양가 죽은뒤 조선조에서 벼슬길을 멀리한 반면 장흥파에서는 마천목이 태종 이방원의 막료로 조선개국에 일익을 맡았던 인연으로 융성을 누리는 계기를 잡았다.
천목은 상장군으로 있으면서 제2차 왕자의 난에 방원을 도와 태종으로 등극하자 좌명공신 3등이 되어 회령군에 봉해졌다.
천목의 묘비에는「묘」자 대신「묘」자를,「주북」「주남」등의 기록이 있어 영혼불멸사상을 보이고있다.
천목에게는 승·전·반·준의 네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로부터 장흥계는 다시 파가 나뉜다.
특히 큰아들 승은 이조참판·개성유수 등을 지낸 청백리로 실록에 기록되기도 했다. 그의 청렴함은『벼슬간 임지서 돌아올 때 옷과 이불보따리 두개뿐이었다』고 적은 문종의 치제문아 잘나타나 있다.
마씨들은 문보다 무에서 더 두드러진 인상이다. 임란때 진주에서 거병, 남강전 등에서 공을 세운 운종·온종·창종등 오종형제가 있는가 하면 황석전에서 순절한 경련·가련 형제가 있다. 또한 전의 6세손 하수는 네 아들을 데리고 명량해전에 잠가, 적선에 포위된 충무공을 구하려고 칼을 빼어들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고 응방·응정·응허형제는 정유재란때 남원성 싸움에서 끝까지 싸우다 옥쇄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문에서는『품휘집』을 남긴 마지룡·마형모, 해서와 초서에도 능했던 마성린, 화가로 이름을 떨친 마군후 등이 있다.

<죽계는 성리학 대가>
목천집안 경수의 7세손 의경은 화담의 문인으로 성리학의 대가. 호가 죽계인 그는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무덤을 지키는 효자로 율곡이 그의 효렴과 박학함을 칭송하며 벼슬을 추천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열을 쏟았다.
일찌기 서경 유수 윤근수가 그의 위명을 듣고 찾아와『난초는 깊은 계곡에 있어도 향기가 절로 배어난다 (재란유곡향기자전)』고 그의 깊은 학문과 인품에 감탄했다.
이런「불사유학」의 기풍은 이어져 죽계의 손자 악보 마사종은 오음 윤두수의 문인으로 세상에서 그를『서경의 아유』라고 칭했다.
그는 주자가례가 현실에 맞지 않는다 하여 당시 실정에 맞게『사례비요』『오륜통의』를 저술, 예도를 바로잡는데 힘을 쓰기도 했다.
이밖에도 목천계에서는 상원·유·지미·맹하 등의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사종의 당질 인호는 병자호란때 구홀에 발벗고 나서 임금으로부터 염지중추부사벼슬을 받았고 고종때 마종성은 정삼품 벼슬인 통정대부중추원의관물 지내기도했다.
한말 마씨들은 많은 의인·열사를배출했다.
치악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하다 순사한 마협화, 3·1운동시 의성서 궐기, 대구교도소에서 3년형 복역후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을 중심으로 광산노동자들을 규합, 항일투쟁을 벌인 마춘성, 북간도 남부지방회장을 맡았던 마룡하등 유무명의 많은 애국독립운동가들이 있다..
특히 간도에 망명, 창동학교를 설립한 마진은 대한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충렬대를 이끌고 국내로 진격하다 돈화현에서 일군과 교전중 아들 천룡과 함께 장렬반 최후를 마쳤다.
아동문학가 마해송은 소천·소파 등과 함께 어린이운동을 주도, 많은 동화를 발표하는 한편 어린이헌장을 기초하기도 했다.
기업인으로는 마웅호 녹십자사장과 버거코리아대표 영호씨가 형제간이며 언론계에는 마삼렬 광주MBC사장과 마실언 조선일보부국장 등이 있다.
교수로는 서울대농대수의학과에 마점술, 경북대에 마진호, 부산대에 마순일 등 제씨가 활약중이며 특히 한국의 족보에 관한 연구로 독보적인 업적를 쌓고 있는 마만주씨 등 각계에 고루 활동하고 있다.
▲다음주는「광주이씨」글 이만훈기자|사진 양원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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