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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21. 도쿄 올림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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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도쿄올림픽 성화 최종 주자 사카이 요시노리. 그는 패망을 딛고 재기한 일본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1964년 10월 10일. 제18회 올림픽이 개막하던 날의 도쿄 하늘은 끝간 데 없이 맑았다.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올림픽의 성화가 불타올랐다. 성화의 최종 주자는 열아홉 살의 와세다 대학생 사카이 요시노리였다. 사카이는 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 태어났다고 했다. 사카이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 일본의 세계를 향한 평화의 제스처요, 패전의 참화를 딛고 재기했음을 알리는 선언이며 전범국에서 원폭 피해자로의 이미지 변신을 꾀한 것이다.

오후 두 시. 세계 93개국 7500여 젊은이들의 행진이 시작됐다. 한국은 알파벳 순서에 따라 46번째로 입장했다. 기수는 레슬링 코치 최명종씨. 모자를 벗어 본부석에 경의를 표하다가, 나는 스타디움 동쪽에 자리잡은 동포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절규하듯 만세를 외쳤고,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감격 속에서 나는 세계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보라, 우리의 건아들을, 그리고 어떤 시련에도 굴함없는 우리 겨레를!

오후 세 시. 일왕의 개회 선언으로 대회의 막이 올랐다. 이제 감격은 잦아들고 '현실'이 나의 뇌리에 날아와 박혔다. 경기 결과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대한체육회장직을 맡자마자 바로 이 대회에 대비해 동분서주하지 않았던가. 정신없이 달려온 시간들이 10만 개의 오색 풍선으로 가득 찬 도쿄의 하늘을 배경으로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조국의 염원, 일본의 하늘에 태극기를 올리고 애국가를 연주할 수 있을 것인가.

결론적으로 도쿄올림픽은 우리에게 냉엄한 현실을 깨닫게 한 대회였다.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했지만 숫자가 메달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마라톤은 당시 세계 수준에서 8분이나 뒤졌다. 구기종목에서도 상위 입상의 가능성은 없었다. 육상과 수영 등 메달이 많이 걸린 종목에서 한국의 경쟁력은 '제로'였다. 나는 대회가 진행될수록 세계의 벽을 실감했다. 분명한 수준차는 우리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기까지 인고의 세월을 견뎌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한국은 권투.레슬링.유도.역도 등에서 메달이 기대됐다. 은메달 두 개, 동메달 두 개가 목표였다. 한국은 권투 밴텀급의 정신조와 레슬링 52㎏급의 장창선이 은메달, 유도 미들급의 김의태가 동메달을 따냈다. 종합 27위. 개최국의 이점을 살려 금메달 16개.은메달 5개.동메달 8개를 따낸 일본과 남자하키를 제패한 인도에 이어 아시아에서 3위였다. 대회 참가국 가운데 동메달 한 개라도 따낸 나라는 41개국에 불과했다. 종합1위는 금 36.은 26.동 28개를 따낸 미국, 2위는 금 30.은 31.동 35개를 따낸 소련이었다.

대회 기간 내내 나는 밤잠을 설쳐야 했다. 요요기 선수촌에 들어간 첫밤부터 시작된 불면증이었다. 다음날 경기에 출전하는 우리 선수의 얼굴이 하나 하나 떠올라 온갖 상상의 가지를 쳤다. 9월 그믐날 밤, 나는 벼루에 먹을 갈아 흰 종이에 이렇게 썼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이튿날 선수들의 방방을 찾아가 내 손으로 직접 붙여 주며 말했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기도 했다. "결과가 어떻든 나는 여러분이 최선을 다한 것으로 믿겠다."

나는 믿는다. 64년의 그 가을, 우리의 젊은이들은 도쿄의 하늘 아래서 최선을 다해 싸웠다고. 이들이 흘린 땀과 눈물로 해서 훗날 양정모의 금메달과 서울올림픽의 영광이 잉태되었다고. 41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함께 얼싸안고 울고 웃던 그들이 불현듯 그립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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