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902>제80화 한일회담 (101)|김대사의 고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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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유택 주일대사와「오오노」(대야) 일본외무차관은 「기시」일본수상의 방미등정 하루전인 57년6윌15일 제4차 한일회담을 9월2일 열기로 하는등 양국현안에 관해 완전 합의했다.
53년10월「구보따」망언으로 결렬된지 4년만에 회담이 재개될 모든 준비가 완료된 것이었다.
양측 예비회담 대표들은 「구보따」망언과 대한재산청구권 주장의 철회등을 포함한 8개의 구상서와 합의각서 및 공동성명의 문안에 최종적으로 합의했다.
이대통령의 재가만 난다면 한일양국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을 그런 분위기였다.
김대사는 6윌11일 밤까지 계속된 예비회담에서 최종문안을 빼고는 원칙적으로 합의본 사항을 밤새껏 정리, 본부에 12일 타전해왔다. 그는 나에게 『모든 문제가 해결됐으니 「기시」수상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조인할수 있도록 이대통령에게 잘 보고해 빨리 재가를 얻어달라』고 당부했다.
조장관과 나는 주일대표부의 보고를 세밀히 검토해본 결과 이대통령도 특별히 반대할 만큼 미흡한 점이 없다는 판단이 들어 대통령께 재가를 올렸다.
그러나 이대통령은 가타부타 말씀하지 않고 재결을 미루는 것이 아닌가. 김대사는 조석으로 전화를 걸어 『본부에서는 대체 뭘 하느냐』고 다그치는 형편이었다.
나는 경무대의 박찬일 비서관등을 통해 이대통령의 재가가 속히 나오도록 공작했으나 朴비서관도 이대통령이 아무 말씀이 없으니 어쩔수 없다고 오히려 하소연하는 처지였다.
그러니 김대사의 입장은 여간 난처하지 않았던 것 같다. 김대사는 국제전화로『외무성 고위관리들은 조인식을 언제쯤이면 할수 있느냐고 조석으로 문의해 오는데 본부에서 꿀 먹은 벙어리로 가만히 있으면 어떡하느냐』고 역정을 낼만큼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6월l6일 김대사는 미국으로 떠나는「기시」수상을 환송키 위해 하네다공항에 나갔다. 「기시」수상은 상당히 서운한 눈치로 김대사와 악수하면서『곧 이대통령으로부터 좋은 소식이 와서 조인식이 이루어질 것으로 알고 떠난다』고 말했다 한다.
김대사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물러설 수도 없어『틀림없이 곧 조인하게 될 터이니 그렇게 알고 잘 다녀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기시」수상이 미국으로 떠난 다음날 이대통령이 조장관을 불러 합의각서등에 관해 몇 가지 내용과 자구를 수정하라고 지시, 그날로 김대사에게 타전했다.
김대사는 이 지시를 받자 힘이 쭉 빠지며 『이제는 다 틀렸구나. 만사휴의로구나』하는 생각과 더불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고 한다.
나중에 김대사가 내게 털어놓은 바로는 이 좌절이 그의 주일대사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쳐 심신쇠약증을 낳게한 한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김대사는 5윌하순 대사임명식때의 이박사 훈시가 떠오르더라고 털어놓았다. 『그때 대사 임명장 수여와 선서식등이 끝나고 나서 이대통령은 전 각료들을 돌아보시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김유택총재를 주일대사로 임명했는데, 김총재더러 국교정상화 하라고 보내는게 아니야. 지금은 일본과 국교정상화할 때가 아니야. 적어도 40세 이상 된 한국사람들이 모두 죽은 뒤라야 국교정상화가 제대로 되는거야. 그러니 김대사가 가거든 저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지 그저 듣기만 해. 아무 것도 하지 밀고 나에게 보고만 해. 내가 무어라고 하기 전에는 절대로 움직이지 말어….』
나는 국교정상화 하라고 보내는줄 알았는데 단지 정탐만 하고 보고만 하라는 대통령의 말을 듣고는 기분이 별로 유쾌하지 않았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내가 부임하자마자 한일현안을 타결하려고 동분서주한 것이 잘못이었어.』 그러면서 김대사는 무슨 얼굴로 일본측과 다시 교섭을 재개할 수 있겠느냐고 한숨을 쉬며 나에게 고충을 밝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김대사는 얼마후 내가 이대통령의 지시를 방아 다시 교섭을 재개하라고 훈령했을때 뛰지 않을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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