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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칼럼] 경조사 문화도 반퇴시대 맞게 조정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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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수 객원기자

직장에서 퇴직해 집에서 쉬고 있는 정모(62)씨는 며칠 전 아내와 말다툼을 벌였다. 친한 친구의 부친상에 들고 갈 부의금을 놓고서다. 현역 시절 주위에서 상을 당했을 때 하던 대로 10만원을 부조하려고 했지만 아내가 반대하고 나섰다. 집에 노는 처지에 무슨 10만원씩이 하느냐며 5만원만 하라는 것이었다. “내 부친상 때 그 친구가 10만원을 했으니 나도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설득을 해봤지만 아내는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 없이 5만원만 들고 갔지만 나중에 그 친구를 볼 낯이 서지 않을 것 같다.

대기업 부장인 김모(53)씨는 고교 동창생 아들의 결혼식에 갔다가 축의금을 얼마나 낼지 고민에 빠졌다. 동창생은 기껏해야 1년에 한번 볼까 말까 하는 어정쩡한 사이였지만 청첩장을 보내온 터였다. 화장실에 들러 흰 봉투에 5만원 권 2장을 넣었다가 1장을 빼고 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가 두 눈 딱 감고 2장을 집어넣었다. 자신의 딸이 결혼할 때 되돌려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지만 대기업 부장 체면에 쩨쩨하게 굴 수 없다는 생각이 앞섰다.

수명연장· 만혼 등으로 퇴직후 경조사 몰려
우리 사회에서 결혼식이나 상갓집에 부조를 하는 경조사는 일종의 스트레스다. 축하해 주고 위로를 해주기에 앞서 여러 경우의 수를 따지며 번민하지 않는 월급쟁이는 거의 없지 싶다. 청첩장이나 부고장을 받는 순간부터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얼굴을 내밀 것이냐 말 것이냐부터 얼굴을 내민다면 얼마를 해야 하며, 과연 그 돈의 회수 가능성은 있는지 등등. 경조비를 얼마나 할 것이냐는 대개 관계의 경중으로 결정된다.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일수록 그 액수는 늘어나게 돼 있어 경조사를 일일이 챙기다 보면 빤한 수입으로 가랑이가 찢어진다.

은퇴 후에도 경조사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다. 어쩌면 가장 큰 용돈 사용처 가운데 하나가 부조일 수 있다. 대개 50대 중반부터 60대 중반까지 경조사가 제일 많은 시기다. 하지만 이 시기는 은퇴자에겐 보릿고개에 해당한다. 수입은 왕창 줄어들었는데 자녀 결혼 등 가정의 대소사가 한꺼번에 밀려들어서다. 자연 피부로 느끼는 체감 경조 부담이 현역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 더구나 은퇴를 하게 되면 아내로부터 지출 통제를 받게 된다. 남편의 바깥 생활을 잘 이해하는 아내라면 모를까 십중팔구 경조 수와 액수를 놓고 부부가 자주 부딪힌다. 아내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 또는 용돈이 모자라서 새로운 모임을 피하는 은퇴자도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기왕의 사람들의 경조사를 챙기는 것도 버거운 상황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는 것은 경조 부담을 늘리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경조사비는 상호부조의 성격이 강하다. 과거에 받은 만큼 돌려주지 않고 모른 채 하면 욕을 먹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득이 줄어도 경조사비를 줄이기 어렵다. 반대로 결혼 안 한 자녀가 있거나 부모가 아직 살아 있는 경우에는 경조사비 지출을 후일을 위한 투자로 여기기도 한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느냐에 따라 혼주나 상주의 사회적 관계를 가늠하는 분위기도 경조 부담으로 작용한다. 최근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대형화·고급화하는 것도 한몫 한다. 얼마 전 친구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한 김기동(58)씨는 “호텔에서 결혼식을 해 식대만 1인당 10만 원이 넘을 텐데 봉투에 10만원만 넣을 수 없어 20만원을 넣었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다. 평균 수명 연장에 조기 퇴직, 늦은 결혼 풍조 등의 사회적 현상이 맞물리면서 경조 부담은 갈수록 커질 전망이다. 우리나라 직장인의 평균 퇴직연령은 55세 전후다. 하지만 구조조정과 희망퇴직 등으로 직장인의 실질 정년은 이보다 훨씬 이르다. 그에 반해 자녀의 결혼 연령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최근 서울시 발표에 따르면 서울에 거주하는 남녀의 초혼 연령이 모두 30대(남 32.3세, 여 30세)에 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녀의 결혼이 늦어지면서 퇴직 후 자녀를 시집장가 보내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수명 연장은 부의금 부담을 은퇴 후 시점으로 몰리게 만든다. 가장 많이 사망하는 최빈사망연령은 지난해 86세에서 2020년엔 90세를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은퇴한 다음에 부모상을 치를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내 부모뿐 아니라 친구나 친지의 부모도 사정이 비슷하니 은퇴 후 부의금 지출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부조금은 원래 목돈이 들어가는 행사 때 이웃이나 친척끼리 십시일반으로 돈이나 음식·노동력을 보태 일을 잘 치르도록 돕고 자신이 닥쳤을 때 도움을 받는 풍습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품앗이 풍습은 거의 사라졌다. 이를 대체한 것이 바로 ‘현금 박치기’ ‘눈 도장 찍기’로 관계가 이어지는 경조사다. 세상이 각박해져서인지 경조사도 일종의 교환행위가 됐다. 교환이 성립되기 위한 조건은 의외로 간단하고 엄중하다. 주면 받아야 하고 받으면 되돌려 주어야 한다. 받지 않으면 상대를 거부하는 것이고 받은 만큼 되돌려주지 않으면 관계를 재고하겠다는 의미다.

뿌리대로 거둬지지 않는 경조사비
그러나 적어도 은퇴자한테는 경조사비가 뿌린대로 거둬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비한 투자로 여기면서 어쩔 수 없이 지출을 단행하지만 사실 돌려받는 금액은 평생 내가 뿌린 돈의 절반도 안 된다고 한다. 친인척이 아닌 이해관계로 인해 부조를 했던 대상들은 은퇴 후 경조사를 알렸을 때 나 몰라라 하기 십상이다. 현직에서 물러난 후 자녀가 결혼을 하거나 상을 당했을 때 지금껏 갖다 바쳤던 경조비를 모두 수확하겠다는 생각은 아예 접는 게 좋다. 올 1월 퇴직한 경기도 일산의 김모(59)씨는 그동안 투자했던 것이 아깝지만 경조사에 대해선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정말 친한 사람이 아니면 외면하고 자신의 경조사도 최대한 간소화하는 쪽을 택한 것. 그래서 지난 4월에 있었던 딸의 결혼을 친지와 딸의 친구, 옛 회사 동료 등 20여명만 불러 조촐하게 치렀다. 김씨는 “노후에 경조사 문제로 고통을 받고 싶지 않다”며 “그러려면 나부터 솔선해 적게 주고 적게 받는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경조사 소식이 세금고지서처럼 느껴지거나 노후 은퇴자의 정신적·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현실은 분명 잘못됐다. 하지만 경조사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뿌리를 내린 문화다.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언론 등에서 체면과 형식을 앞세우는 허위의식을 버리고 경조사 대상 범위를 좁히면서 경제적 수준에 맞춰 지출하자는 캠페인을 벌였지만 그렇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반퇴시대에 경조사 문제를 평소와 같이 접근했다간 호주머니가 거덜나는 건 시간문제라는 사실이다. 구호로만 외치지 말고 현역시절부터 경조사비를 다이어트하는 습관을 길러보자.

서명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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