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쏭달쏭 북·중 이야기(9)] 김정일과 후진타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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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김정일과 덩샤오핑·장쩌민의 관계를 다뤘습니다.

이 시기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북·중 관계는 혈맹에서 전통적 우호협력 관계로 변했고

둘째, 북핵 1차 위기를 거치면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우려가 커졌고

셋째, 중국의 부상에 따라 대북 영향력도 확대됐다는 것이지요.

오늘부터 김정일과 후진타오를 다루겠습니다. 덩샤오핑·장쩌민과 김정일이 ‘불편한 동거의 역사’였다면 후진타오와 김정일은 어떤 역사였을까요?

김정일과 후진타오는 1942년생으로 동갑내기입니다. 굳이 생일로 따지자면 김정일이 2월 16일생이고 후진타오는 12월 21일생이지요. 김정일이 10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두 사람의 공식 직책을 살펴보면 후진타오는 중국 공산당 총서기, 국가주석,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등 중국의 당·정·군을 쥐고 있었지요. 김정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노동당 총비서, 국방위원장, 인민군 최고사령관 등.

국방위원장이 북한 정부를 대표하는 헌법상의 직책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모든 권한을 갖고 있었지요. 김정은은 아버지와 같은 직책을 피하기 위해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라며 ‘제1’을 추가한 것입니다. 북한은 1998년 9월 헌법개정으로 북한 정부를 대표했던 국가주석을 폐지하고 그 권한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넘겼지요. 명목상입니다.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만난 것은 2004년 4월 (베이징), 2005년 10월(평양), 2006년 1월(베이징), 2010년 5월(베이징), 2010년 8월(베이징), 2011년 5월(베이징) 등 6차례입니다. 후진타오가 국가주석이 되기 이전에 중국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제1서기 (1984년)과 정치국 상무위원 (1993년) 으로 평양을 방문했지만 두 사람이 만났는지는 문헌상에 없어요.

후진타오는 2002년 11월 8~14일 열린 중국 공산당 당대회에서 장쩌민의 바통을 이어받아 총서기에 선출됐습니다. 신중국 제4대 황제였지요. 그를 지지했던 제4세대는 장쩌민으로 대표되는 제3세대와 생각이 달랐어요. 외교전략은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화평발전(和平發展)으로, 경제전략은 선부론(先富論)에서 균부론(均富論)으로 바꾸지요. 북한과의 관계는 외교전략에 해당되므로 화평발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국가의 외교적 변화는 국제환경의 변화, 국내상황의 변화, 그리고 그 양자의 복합적 변화라는 동인에 의해 영향을 받지요. 후진타오 체제는 국제적 환경에서 다시 제기된 중국위협론(China Threat Theory)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중국의 부상에 대한 국제적 협력을 유도해야 했어요. 국내적 상황은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제3세대 지도부와 차별화된 외교전략이 필요한 상황이었고요.

중국위협론은 1990년대 장쩌민을 비롯한 중국의 제3세대 지도부가 경제적 부흥을 바탕으로 종합국력의 신장 및 강대국화를 시도하자 1997년 출판된 리처드 번스타인·로스 먼로의 The Coming Conflict with China와 2000년에 출판된 빌 거르츠의 The China Threat: How the People's Republic Targets America에서 제기됐지요. (계속)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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