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쏭달쏭 북·중 이야기(8)] 김정일과 장쩌민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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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은 2002년 10월 북핵 위기가 다시 발발하자 대북 강경책으로 일관한 미국 부시 행정부와 보조를 맞추려고 했어요. 그는 2002년 11월 제16차 당대회를 통해 총서기 자리를 후진타오에게 물려주지만 2003년 3월 15일까지 국가주석으로 있는 동안 미국과 한 목소리를 냈지요. 장쩌민은 2003년 1월과 2월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2003년 1월 10일)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장쩌민은 만약 김정일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 두 가지를 걱정해야 했어요.

첫째, 일본의 핵무장 충동과 함께 미국이 대만에 핵탄두를 배치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둘째, 북한이 경제 제재로 붕괴하면 중국은 사회주의 형제국가의 붕괴를 지켜보게 될 뿐 아니라 대규모 난민을 맞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지요.

그는 ‘애매한 현상유지’를 통해 두 가지의 극단적인 상황을 피하고자 했어요. 장쩌민은 북핵 문제를 접하면서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김정일과 가까이 할 필요가 있었지요. 김정일도 북한 보다 미국에 더 가까이 가고 싶어하는 장쩌민을 멀리할 수 없었어요.

김정일은 장쩌민과 개인적인 친분이 없었기 때문에 북·중 관계가 더 돈독해지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어요. 장쩌민이 과거보다 더 실용적인 여건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자신보다 16살 많은 장쩌민과 좋은 관계 속에서 북한이 처한 경제난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북한의 경제성장을 기대할 뿐이었지요. 그래서 김정일은 2000년과 2001년 두 차례 중국을 방문하면서 베이징, 상하이 등에서 중국의 경제성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지요. 그 결과로 2002년 7월 경제관리개선조치, 개성공단 본격화 등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습니다.

장쩌민과 김정일은 가슴보다 머리로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가슴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진한 공감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양국의 실리를 위해 겉으로는 웃었지만 치열하게 두뇌 싸움을 한 것이지요. 장쩌민은 김정일이 과감한 개혁·개방을 도입해 경제 발전을 지속하고 중국의 든든한 지원자가 돼 주기를 기대했지요. 김정일도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지만 중국식으로 과감하게 따라가기는 여전히 주저했지요.

장쩌민과 김정일.

두 사람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양국의 지도자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외교 관계도 새롭게 정리(혈맹→전통적 우호협력 관계)하고 새 출발을 했지요. 결국 새로운 출발은 북한과 중국을 더 이상 혈맹이라고 부르지 않게 됐습니다. (끝)

다음은 ‘김정일과 후진타오’편이 이어집니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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