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쏭달쏭 북·중 이야기(3)] 김정일과 덩샤오핑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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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과 면담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온 김정일은 “이제 중국 공산당에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존재하는 것은 수정주의뿐이다. 그리고 중국의 지도자들을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했지요.

이 말을 전해들은 덩샤오핑은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로 인해 중국의 운명이 위협받는 사태가 일어나지 말아야 할 텐데”라고 개탄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 일은 김일성이 수습해 표면적으로 가라앉았지요. 하지만 중국 지도부는 김정일을 주의 깊게 보게 됐고 김정일 역시 마음속에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됐지요. 김정일에 대한 중국의 우려는 몇 달 뒤에 현실화 됐어요.

바로 버마(지금의 미얀마)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1983년 10월 버마 아웅산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과 각료들에 대한 테러였지요. 아웅산 테러는 한국이 중국·소련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자 김정일이 북한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테러를 강행한 것으로 알려졌지요. 한국에 대한 일종의 강력한 경고였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중국을 경악시켰지요. 무엇보다 국경 주변의 안정화를 중시하던 중국에게 북한이 얼마나 파괴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례였지요.

당시 중국 지도자들은 국가원수를 상대로 테러를 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어요. 김정일이 몇 달 전 ‘대를 이은 우호’를 강조했다는 점과 중국에 전혀 ‘귀뜸’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망이 더 컸던 것이지요.

아들이 저지른 ‘대형 사고’를 결국 아버지가 수습할 수 밖에 없었어요. 김일성은 이 사건의 실무 책임자인 대남비서 김중린(1924~20100을 퇴진시키고 그 자리에 외교부장인 허담을 앉혔지요. 허담은 김일성 고모의 사위로 1970년부터 북한 외교를 이끌어 왔어요. 한 마디도 북한 외교의 틀을 잡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외교부장에는 김영남(현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임명했어요.

아웅산 테러 이후 덩샤오핑은 김정일을 만나지 않습니다. 덩샤오핑은 그 사건 이후 1997년 사망하기 전까지 김일성만 세 차례 만났어요. 김정일은 덩샤오핑이 사망한 뒤 2000년 5월 베이징을 방문해 덩샤오핑의 뒤를 이은 장쩌민 국가주석을 만났지요. (끝)

다음 [알쏭달쏭 북·중 이야기]는 김정일과 장쩌민 편입니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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