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쏭달쏭 북·중 이야기(1)] 김정일과 중국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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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아직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74년 후계자로 확정된 뒤 1983년 중국을 방문해 덩샤오핑을 만난 것에 비하면 초라하다고 할 수 있지요. 혈맹으로 출발한 양국 간에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김정은과 중국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김정일과 중국 얘기를 먼저 하려고 합니다.

김정일에게 중국은 어떤 나라였을까요? 그를 만났거나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이 전하는 얘기나 북한 문헌들을 보면 중국은 그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자 북한을 배신한 나라이지요. 그가 생전에 “중국을 믿지 말라”고 한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김정일이 중국을 부러워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첫째, 중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입니다. 김정일이 2001년 1월 중국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입니다. 그가 표현한 대로 중국은 개혁·개방을 통해 천지개벽을 했지요.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북한 주민들에게 약속했던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살게 해 주겠다”는 한 약속을 자신도 지키지 못했기에 중국이 마냥 부러웠지요.

둘째, 미국과의 관계개선입니다. 중국은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극적인 방중에 이어 1979년 국교 정상화로 미국의 위협을 줄일 수 있었지요. 이후 중국은 안심하고 개혁·개방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고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지요.

김일성도 닉슨 대통령의 방중을 계기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했어요. 그러나 저우언라이 총리를 통해 미국에 타진했지만 키신저 국무장관의 무반응으로 결국 실패로 끝났지요.

김정일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경제개발은 중국처럼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6자회담 보다는 미국과의 양자회담을 더 선호했지요. 하지만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과감한 결정을 늦게 내렸고 결정한 내용을 실행에 옮기는 것도 늦어 결국 결실을 거두지 못했어요.

그러면 김정일이 중국을 배신자로 생각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입니다. 중국은 1978년 12월 제11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3중전회)를 열고 개혁·개방을 선포했지요. 국경을 접한 중국이 사회주의의 대원칙인 계획 경제를 버리고 과감하게 시장경제를 도입한 것을 당시 36살의 김정일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3중전회가 끝난 이틀 뒤 김정일은 ‘우리 식대로 살아 나가자’ 라는 구호를 내놓지요. 중국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력갱생을 외치지요.

둘째, 한중 수교입니다. 북한은 중국이 한국과 손을 잡은 것을 용서할 수 없었지요. 가뜩이나 1990년대 동구 유럽이 무너지면서 불안에 떨고 있는 중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충격이 더 컸습니다. 북한은 이에 질세라 노태우 대통령의 방중(1992년 9월)에 맞춰 중국을 “제국주의에 굴복한 변절자이자 배신자”라고 비판했지요.

김정일은 한·중 수교 이후 더 이상 중국으로부터 자국의 안보를 보호받기 힘들게 되자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중국이 핵무기를 가지는 과정과 비슷했지요. 중국도 1964년 중소 분쟁이 지속되고 더 이상 소련으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다고 판단되자 핵실험의 단추를 눌렀지요. (계속)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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