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890) 제80화 한일회담(89) 상호석방교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한일회담이 중단된 53년부터 56년까지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어선의 나포수가 가장 많았다. 53년 47척 5백85명 54년 34척 4백54명 55년 30척 4백98명, 56년 19척 2백35명등 총 l백30척에 1천7백72명이었다.
이 4년간에 나포된 어선과 어부의 수는 47년부터 62년까지 나포된 총2백82척 3천5백11명과 비교해보면 거의 반수에 육박하고 있음을 알수있다.
일본정부는 자국민의 보호라는 문제 이외에도 선주들에게 나포된 선박을 새로 건조하는 자금을 융자해야했고 억류 어민 가족들의 생계비를보조해 주어야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특히 55년11월l7일 연합참모본부총장 이형근대장이 『만약 일본어선이 평화선을 계속 침범한다면 포격은 물론 필요하다면 격침시키겠다』 고 성명한데 대한 일본내의 격렬한 반응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일본정부는 그래서 상호 석방교섭을 서둘렀던 것이다. 당시 「하또야마」정권이 어느 정도 심각하게 이 문제를 받아들였는가는 55년l2월6일 각의와는 별도로 한일대책 특별 각료간담회를 설치한 점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또야마」수상은 이날 각의가 끝난후 하야농림상및 근본관방장관과 별도로 회담하고 외상·농림상·통산상·방위처장관및 관방장관으로 특별간담회를 구성해 한일간의 정상관계 회복방안을 연구토록 결정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날 긴급 소집된 간담회에서 대한처리방침으로 ①한일관계는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이를 위해 미국의 협력을 요청할 것 ②부산수용소에 수용중인 일본어부들을 빨리 구하기 위해 오오무라수용소 문제에도 정치적고려를 할 것 ③평화선문제를 포함한 양국간 현안의 전면적 해결을 모색할 것등이 결정됐다.
그들이 평화적으로 해결한다고 한것은 당시 일본내의 재군비론에 강력한 반발과 의구심을 표시했던 우리측을 의식한 것으로 분석했다.
「하또야마」내각은 전후 역대 내각중 헌법개정에 가장 열성을 보였는데, 그 개정 이유 중의 하나를 평화선문제로 귀걸시키려고 책략했다. 당시 일본지배층은『한국인따위에 얕보이는 것은 일본의 군비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선전. 재무장을 금지한 헌법을 고쳐야한다고 논리를 폈던 것이다.
정치적 고려 결정에 따라 유태하참사관과 중천 아주국장간에 56년초 억류자의 상호 석방협상이 활발하게 진행됐으며 이와 병행해 3월중순 한일양국을 방문한「덜레스」미국무장관의 입김이 양국 수뇌층에 영향을 미쳐 그 결과로 전회에서 말한 상호석방합의가 나왔던 것이다.
중광외상과 김용식공사간에 상호 조건부 협약이 성립됐음에도 이의 실현이 l년간 지연된 것은 일본 관료제도가 과장 내지는 국장이 정책에 상당한 결정권을 행사하는데 있었다.
사실은 이같은 합의가 55년11월16일 김공사와 화촌법상간에 이루어졌는데, 일본법무성 간부들이 이를 반대해 화촌법상은 합의한지 하루도 못돼 이를 부인하는 촌극을 벌였을 정도이니 일본에서 직업공무원들의 권한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것이다.
일본 법무성은 특히 나포와 억류 그자체가 부당한데 형기만료자만의 석방으로 만족한다는 것은 이라인(그들은 평화선을 꼭 이렇게 불렀다)도,나포행위도 승인하는 것이 된다는 반론을 폈다.
또 오오무라수용소에 억류된 한국인들중 일본에서 범죄를 저질러 과거 강제퇴거처분을 받은 사람들을 단순히 종전 이전부터 일본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일본국내에 석방한다는 것은 치안상 문제가 있다는 주장을 펴 반발했던 것이다. 이를 정치인 출신의 대신들이 억누롤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 관료제도의 묘미(?)라고나 할까.
「하또야마」 내각은 이같은 자체 이견조차 조정하지도 못하면서 미국에대해서는 한일간의 조정을 수시로 부탁하는 이율배반적 행동으로 일관했다.
우리측으로 봐서는 일본측의 이같은 자세가 괘씸했고 이에따라 우리도 마냥 일본측에 질질 끌려다닐수없어 「구보따」 망언의 철회를 선행조건으로 강력히 내세웠다.
결국 「하또야마」 수상의 집권 동안에는 억류자 상호석방도, 한일회담 재개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