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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 파이터'의 진단 … "0% 물가 문제 없어, 디플레 너무 걱정 말고 물가 무조건 잡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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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폴 볼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사공일 본사 고문이 이사장으로 있는 세계경제연구원(IGE)이 창립될 때부터 명예 이사장이다. 동시에 사공 고문은 볼커가 만든 모임의 멤버이기도 하다. 이런 둘이 뉴욕 맨해튼 록펠러센터 볼커 개인 사무실에서 마주 앉았다. 글로벌 현안을 토론하기 위해서다.

 ▶사공일=한국 오피니언 리더와 정책 담당자들이 볼커 당신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주 궁금할 것이다.

 ▶볼커=2013년 비영리 기구인 ‘볼커 동맹(Volcker Alliance)’을 설립했다(사공 고문은 이 동맹의 멤버다). 요즘 미국뿐 아니라 거의 모든 나라 정부가 신뢰를 잃고 있다. 정책의 ‘집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다. 미국의 유명한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은 “실천(집행)이 없는 비전은 환상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비전 제시보다 집행 방법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공=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첫 회의(2013년)에 참석했다. (볼커 얼라이언스가) 아주 유용한 일을 하고 있다고 본다.

 ▶볼커=잘츠부르크에서 다음 회의도 열릴 예정이다. 다음 주제 가운데 하나는 사실상 붕괴 상태인 미국의 금융 시스템이다. 현재 미국엔 금융 감독 기구가 난립해 있다. 권한과 업무도 중첩돼 있다. 모든 사람은 이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입법 단계에선 아무 일도 이뤄지지 않는다.

 ▶사공=당신은 1979년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됐다. 8년 동안 해마다 10% 또는 15%에 이르던 인플레이션을 해결하는 데 주력했다. 이후 정책 환경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요즘 Fed는 일자리 창출에 더 치중하고 있다. 이런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볼커=요즘은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전통적이지 않은 정책이 필요한 시대다. 하지만 요즘 중앙은행이 전반적으로 ‘인플레이션 타깃 2%’에 집착하고 있는 게 걱정스럽다. 좀 더 설명하자면 이렇다. 나는 곧 증손자를 보게 된다. 해마다 물가가 2%씩 오른다면 내 증손자가 장년이 됐을 때 물가는 지금보다 4배 정도 높아진다. 30년마다 물가가 2배 오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중앙은행의 첫 번째 책임은 물가안정이다. 다행히 현재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낮게 유지되고 있다. 아주 좋은 일이다. 물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원칙만은 지켜야 한다.

 ▶사공=평소 당신은 "인플레를 타기팅(물가가 목표치에 이르도록 하는 것)할 게 아니라 물가는 억제 대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볼커=안정적인 인플레 타깃이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물가 상승률이 0%가 될까 크게 걱정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사공=디플레이션 기대심리가 퍼져 있다면 중앙은행이 반드시 "물가가 2%까진 오르도록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도 유용하다고 본다.

 ▶볼커=디플레를 우려하는 쪽은 (대공황 시대인) 30년대를 자주 이야기한다. 그때는 물가가 연 5% 또는 10% 정도 하락했다. 요즘 물가가 5% 또는 10% 떨어진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사공=요즘 많은 사람이 일본식 ‘잃어버린 20년’을 겪지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물가 상승률 둔화에 너무 민감한 것 같다.

 ▶볼커=90년대 일본이 주가와 집값 폭락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일본을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게 하나 있다. 바로 노동력 감소다. 일본의 노동 인구는 줄고 있다. 1인당 소득 측면에서 보면 그리 나쁘지는 않다. 한국 상황은 어떤가.

 ▶사공=노령화가 아주 빠르다. 합계 출산율이 1.19로 세계에서 아주 낮은 수준이다. 한국이 일본을 빠르게 닮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요즘 유럽의 디플레이션 리스크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크다.

 ▶볼커=유럽이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물가는 큰 걱정거리가 아니다. 다만 독일 등은 잘하고 있는 반면 그리스와 스페인 등 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리스와 채권자인 트로이카(EU·ECB·IMF)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앞으로 한두 달 동안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따라 그리스의 미래가 결정될 전망이다.

 ▶사공=유로존이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양적완화(QE)를 실시하기시작했으나 미국의 벤 버냉키와 재닛 옐런만큼 효과를 거두기는 어려워 보인다.

 ▶볼커=그렇다. 정부 자체를 하나로 묶지 않은 통화동맹(단일통화 시스템)을 운영하는 일은 어렵다.

 ▶사공=미국의 새로운 금융법규인 도드-프랭크법에 반영된, 당신이 제안한 ‘볼커 룰(Volcker Rule)’에 대해 만족하는가(볼커 룰은 대형 금융회사들이 고객의 돈이 아닌 자기자본을 주식이나 파생상품 등에 투자하는 것을 제한하는 금융법규를 말한다).

 ▶볼커=볼커 룰은 아주 시의적절한 시기에 법으로 제정됐다. 일부 대형 은행이나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볼커 룰의) 기본 원칙을 거부할 순 없다. 대형 은행은 아주 필수적인 금융기관이다. 본연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해야지 투기해선 안 된다.

 ▶사공=당신이 애초 제안한 것보다 많이 수정돼 법으로 제정됐는데 큰 문제는 없다고 보는가.

 ▶볼커=입법 과정에서 적잖은 예외 규정이 삽입되기는 했다. 대형 은행이나 소형 은행이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다. 여전히 예외 규정을 늘리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은행이 헤지펀드를 마음대로 소유할 수 없고 자기자본을 여기저기에 투자할 수 없다. 금융회사 로비스트들이 여전히 볼커 룰에 대해 불평하는 까닭이다.

 ▶사공=볼커 룰 입법으로 미래 금융위기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이를 피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해볼 만하다.

 ▶볼커=미국 금리가 제로 수준으로 낮은 점도 국제 금융시장의 문제다. 달러 자금을 낮은 금리에 빌려 한국이나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 빌려주는 거래(달러 캐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신흥국에 빌려준 달러 자금이 늘어나고 있다. 신흥국이 갚을 땐 달러로 상환해야 한다. 자국 통화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 위기 순간엔 모두 달러를 회수하려고 한다. 아주 심각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사공=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당신은 “요동하는 국제 자본시장이란 바다에서 미국은 대형 여객선이고 신흥국은 남태평양의 카누와 같다”고 은유적으로 말한 게 기억난다. 신흥국들이 Fed의 기준금리 인상을 우려하는 이유다.

 ▶볼커=(웃으며) 미국 외 다른 나라들이 이제는 카누가 아니다. 모터보트 정도는 됐다.

 ▶사공=그래서 주요 국가들의 정책 협력과 조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볼커=아직 해결되지 않은 숙제 가운데 하나가 효과적인 국제 통화 시스템이 없다는 점이다. 한때 국제통화기금(IMF)이 연 콘퍼런스에 참석한 적이 있다. 현재 국제 통화 시스템의 문제점을 토론하는 자리였다. 결론은 현재 시스템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지만 어느 누구도 개혁하지도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공=그런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집단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주요 20개국(G20) 체제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주인의식을 갖고 리더십을 행사하는 회원국이 없어 걱정이다.

 ▶볼커=난 처음부터 G20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G20이 모여 현안을 논의한다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함께 큰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아서다.

 ▶사공=어렵지만 불가능하다고는 보지 않는다. 프랑스 토마 피케티의 책 『21세기 자본』은 어떻게 평가하는가. 그가 소득 불평등을 세계적인 문제로 부각시킨 것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그의 분석방법이나 정책처방엔 문제가 있다고 본다.

 ▶볼커=관심을 일으키기는 했다. 축하할 만한 일이다. 지난 수십 년간 미국에서 근로자의 평균 소득이 늘지 않은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이는 정치·경제·사회적 문제로 더욱 심각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 시민이 보기에 금융계는 다른 세상 같을 수 있다. 50년대 은행장의 연간 소득은 20만 달러(요즘 달러 가치론 40만 달러)였는데 요즘은 2000만 달러나 된다.

 ▶사공=소득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이 자리에서 다 논의할 수는 없지만 중장기적인 차원에서 교육개혁과 평생 교육의 중요성을 더 강조할 필요는 있다.

 ▶볼커=미국에선 고소득층의 조세저항이 교육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런데 또 다른 글로벌 이슈는 부패다. 미국엔 부패가 합법화된 경우가 많다. 로비가 아주 거세 워싱턴(입법·행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한국의 부패 상황은 어떤가.

 ▶사공= 부패는 모든 나라의 골칫거리다. 상대적인 의미에서 한국의 부패는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한국엔 강한 야당이 있다. 인터넷의 확산으로 한국 사회가 훨씬 투명해졌다.

 ▶볼커=중국은 어떤가. 요즘 중국인들이 부패를 심각하게 보고 문제 해결에 나선 것으로 보는가.

 ▶사공=현재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부패척결 운동엔 진정성이 있다고 본다. 부패가 경제적 차원을 넘어 사회·정치적 차원의 문제임을 중국 정부가 알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볼커=나는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를 아주 좋아했다. 국제회의 자리에서 만난 그는 강한 어조로 “부패에 관한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고 잘라 말했다. 요즘 중국에 이런 정신이 있는지 궁금하다.

 ▶사공=중국의 부패 문제를 근원부터 해결해야 한다. 정부의 독점적 권한과 인허가권, 각종 규제를 자율화하는 노력이 이뤄지지 않는 한 부패는 계속될 것이다.

Paul Volcker 폴 볼커

1927년 미국 뉴저지주 케이프메이 출생
프린스턴대 학사, 하버드대 정치경제학 석사
전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1979~87년)
전 미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의장(2009~2011년)
별칭 : 인플레이션 파이터

대담 = 사공일 본사 고문
정리=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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