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들이 부딪쳤다 "부장 또 시작이네" "허, 우리도 만날 깨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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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진 수요일] 3040 직장인들 '취중 토크'
물류회사 3년 차 장 사원
윗분 휴대전화·명함 챙기는 것도 일
해외 유학파 안 대리
부장 짜증 내면 카톡 뒷담화로 풀어
과장 승진 앞둔 김 대리
부를 땐 모깃소리, 늦으면 호통도
상사 눈치 보는 최 과장
잦은 회식 스트레스 … 식도염 고통
18년 차 ‘간부 대표’ 오 부장
대박은 안 바라 … 보람만 있다면

30~40대 ‘미생’들이 23일 밤 자신과 어울리는 만화 ‘미생’의 캐릭터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다. 왼쪽부터 김 대리(김동식 캐릭터), 최 과장(한석율), 오 부장(오상식), 안 대리(안영이), 장 사원(장그래). [김상선 기자]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이것은 소설가 김훈 선생의 문장입니다. 밥을 벌어 밥을 먹기 위해 직장을 오가는 이들이라면 이 문장의 어떤 진실 앞에서 문득 목이 멜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사의 무리한 지시에 억지웃음을 내보이며 참아내는 것도(좋아서 웃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지옥 같은 출근길 지하철과 버스를 온몸으로 견뎌내는 것도(정말이지 딱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요!) 다 그놈의 밥벌이 때문입니다.

드라마 ‘미생’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직장은 버티는 게 이기는 곳이다’. 청춘리포트는 버티면 이길 수 있다는 믿음으로 직장 생활을 견디고 있는 5명의 평범한 회사원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대폿집에서 술잔을 부딪치며 묵은 스트레스를 털어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속 시원했던 ‘미생 토크’를 전해드립니다. YES!

미세먼지로 하늘이 온통 뿌옇던 23일 밤. 막 퇴근한 직장인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육교 아래 대폿집으로 모여든다. 드라마 ‘미생’의 오상식 차장이 찾던 단골 대폿집이다. 인터뷰가 시작되기도 전 “갈매기살 5인분에 소주 2병이요!”부터 외치는 직장인 5인. 살아 있지 않은 상태이지만 완생할 여지가 있는 바둑돌을 뜻하는 미생. 이들이야말로 이 땅의 평범한 미생들이 아닐까. 부딪치는 술잔 속에 수위를 넘나드는 솔직담백한 미생들의 이야기가 오간다. 우선 이들의 정체부터 밝혀둔다.

 ① 장 사원(30) : 입사 3년 차 사원. 패기 넘치는 물류회사 총무팀의 막내. 여전히 회사 생활이 낯설 때가 많다.

 ② 안 대리(30) : 입사 6년 차 대리. 3개 국어에 능통한 유학파다. 입사 당시 팀 내 유일한 여자 사원이었다.

 ③ 김 대리(36) : 입사 8년 차 대리. 과장 승진을 앞두고 말 못할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

 ④ 최 과장(36) : 입사 11년 차 과장. 후배들 가르치랴 상사 눈치 보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⑤ 오 부장(44) : 입사 18년 차 부장. 칼 같은 업무 지시와 추진력으로 ‘일 잘하는 부장’으로 통한다. 간부급 사원을 대표해 나왔다.

 - 술잔이 제법 돈 것 같은데.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엄청나죠.

 ▶장 사원=“윗분들 의전을 막내인 제가 도맡고 있어요. 얼마 전 한 본부장님 휴대전화에 금이 갔는데 왜 교체를 안 해놨느냐고 질책을 받았죠. 명함 글씨체가 마음에 안 든다고 내일까지 바꿔놓으라는 분도 계세요. 식은땀 나는 순간이 정말 많아요.”

 ▶최 과장="저는 군대로 치면 상병이죠. 후배들을 챙겨야 하고 상사들 심기도 살펴야 해요. 잦은 회식도 스트레스죠. 며칠 전 역류성 식도염 판정을 받고 일주일간 끙끙 앓았는데 몸무게를 재보니 6㎏이나 빠졌더라고요.”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열거하자면 밤을 새워도 끝이 없을 것이다. 해묵은 이야기를 꺼내놓는 미생들의 얼굴이 점점 붉어진다. ‘스트레스는 일 때문이 아니라 결국 사람 때문’이라고 입을 모으는 그들. 직장 상사 이야기가 시작되자 얼른 소주잔부터 털어 넣는다.

 - 직장 상사에 대해 할 말들 많죠.

 ▶최 과장=“앞뒤 안 가리고 언성부터 높이는 상사가 있어요. 명확한 지시도 없이 ‘이번 프로젝트 근사하게 좀 마무리해봐. 근사하게’라고 닦달하다가 보고서를 가져오면 ‘이게 보고서냐 고등학생 과제물이냐’고 소리를 지르죠.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되면 무조건 자기 공이요, 어긋나면 무조건 후배들 탓으로 돌려서 발끈할 때가 많아요.”

 ▶김 대리=“이해할 수 없는 히스테리를 부리는 분도 있어요. 10m 넘게 떨어진 자리에 있는 부하 직원을 부를 때 모기만 한 목소리로 “김 대리”라고 짧게 읊조려요. 바로 옆에 있는 직원들이 메신저로 “A부장이 부른다”고 알려줘서 허겁지겁 뛰어가면 ‘부른 지가 언젠데 지금 오느냐’고 호통을 치시죠.”

 ▶장 사원=“얼마 전 미숙하다고 질책을 들었어요. 솔직히 막내 혼자 처리하기에 업무량도 너무 많고 버거웠죠. 4일 동안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일을 마무리했더니 ‘거봐. 이렇게 쉽게 되는 걸 지금까지 왜 뭉그적거린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안 대리="요즘엔 뒷담화도 실시간으로 오가요. 회의 때 부장이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면 카카오톡 채팅방에 ‘A부장 또 시작한다’ ‘제발 삿대질 좀 하지 마라’ 등 카톡 대화가 수십 개씩 쌓이죠.”

 소주잔을 기울이며 묵묵히 후배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오 부장. 상사에 대한 뒷담화가 무르익는 가운데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 부장=“상사들도 다 고충이 있어요. 일단 부장이나 차장쯤 되면 윗선에서 들어오는 압박감이 엄청나죠. 부장들도 하루에도 몇 번씩 불려 가서 윗분들한테 엄청 깨져요. 챙겨야 할 직원들도 너무 많죠. 너무 바쁠 때는 알아서 척척 일 처리를 하는 부하 직원들이 제일 예뻐 보이죠.”

 - 어떻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지도 궁금해요.

 ▶장 사원=“운동으로 풀어요. 주말마다 사회인 야구 동호회 회원들과 운동을 하죠.”

 ▶최 과장=“페이스북에 제 심경을 적어요. 저는 그걸 ‘페북에 징징댄다’고 표현하죠. 공감하는 지인들의 댓글도 꼭 챙겨 봐요.”

 ▶김 대리=“역시 술이죠! 술 마시며 떠들다 보면 스트레스도 날아가죠.”

 - 미생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날이 올까요.

 ▶오 부장=“요즘 반퇴 시대라고들 하잖아요. 직장에서 은퇴해도 자식들 결혼시키고 내 몸 하나 건사하려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대박이나 인생역전을 바라기보다 지금 상황에서 나만의 즐거움, 나만의 보람을 찾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장 사원=“영원히 미생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죠. 큰 기대는 없어요. 하지만 먼 훗날 후회는 없도록 지금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 열정을 불태워 보고 싶어요.”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옆 테이블에서 “우리는 회사의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어떤 직장인의 푸념이 들렸다. 누군가 “인터뷰와 상관없이 우리끼리 한잔만 더 하자”며 술을 더 주문했다. 밤늦도록 술잔은 돌았고, 미생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정강현 청춘리포트팀장
채승기·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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