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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입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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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정치국제부문 차장

#1. 설날 연휴 일본 오사카와 고베를 다녀왔다. 그런데 주일 특파원 3년 동안 도쿄에서 겪지 못했던 일을 그곳에서 겪었다. 20일 고베 도심의 횡단보도를 막 건너려 할 때였다. 전차에서 함께 내린 일본인 노부부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일본말이 아니었다.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중국어였다. “저는 한국인입니다”라는 설명에 그들은 너무나 당황스러워했다. “이 사람이 중국어 공부에 열을 올리더니, 주책이네요”라는 할머니의 사과에 할아버지는 “실례했습니다”만 연발했다. ‘도쿄 깍쟁이들’보다 간사이 사람들이 친화적이라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대낮에 생면부지의 외국인에게 말을 거는 일본인은 드물다. ‘내가 중국인처럼 생겼나’라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묘한 기분이었다. 중국 관광객들이 일본을 공습한 춘절 연휴의 한 단면이었다.

 #2. 중국 열풍은 TV도 마찬가지였다. 19일 밤 NHK의 간판 뉴스 ‘뉴스 워치9’는 일본 연구에 심취한 중국인 젊은이들을 다뤘다. 남성 메인 앵커가 직접 중국을 찾아 ‘기술과 문화 선진국, 일본’에 빠진 젊은이들을 만났다. 중국의 30대 여성은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일본을 공부한다. 일본 알기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철저히 일본의 관점에서 꾸며진 기획이라고는 해도 현재 일본에서 ‘중국’은 이렇듯 중요한 키워드다. 20일 아침 민영방송 TV아사히의 교양뉴스 쇼 ‘모닝 버드’는 지난해보다 네 배나 많은 중국 손님이 몰린 도쿄의 백화점을 집중 조명했다. “불룩한 배=부의 상징인 중국인들을 위해 복부 사이즈만 늘린 양복을 디자인했다” “중국어가 가능한 면세 카운터 직원을 두 배로 늘렸다”는 인터뷰가 생생했다.

 #3. 반면 일본 TV에서 한국은 ‘경쟁과 견제’의 대상, 부담스러운 이웃으로 묘사됐다. 중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한국의 노력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엔 “중국인들이 한국을 더 많이 간다는데, 두 나라를 모두 가 본 중국인들에게 어디가 더 좋은지 묻고 싶다. 우리는 자신 있다”는 사회자의 시기심 가득한 발언이 등장했다. ‘역대 최악’이라는 한·일 관계는 양국 모두에서 일상적인 일이 돼버렸다. 아베 신조 총리가 어떤 망언을 해도, 지난 22일 시마네현 주최의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명)의 날’ 기념식에 일본 정부 인사가 또다시 참석해도 한국이나 일본 모두 “또 그랬나 보네”라고 무덤덤하게 넘기는 ‘경지’에 올라섰다고나 할까. 박근혜 대통령 취임 2년, 아베 총리 재등장 2년2개월이 만들어낸 양국 관계의 현주소다.

 ‘관계 경색을 감수하더라도 아베 총리의 무릎을 꿇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정교한 외교 전략이 낳은 결과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뚜렷한 전략이나 그림 없이 국민 감정 맞추기에만 급급하다. 그저 시간만 때우는 것이라면 양국 국민들 사이에 깊어지는 감정의 골짜기가 너무나 딱하다.

서승욱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