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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과 전여옥과 이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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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주안
디지털 에디터

“김기춘 의원을 주시해 보세요. 박근혜 대표가 상당히 신뢰하는 것 같아요.”

 10년 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을 담당하던 나에게 이런 귀띔을 해준 사람은 전여옥 당시 대변인이었다. 박근혜 대표 체제의 핵심 실세는 김무성 당시 사무총장과 유승민 대표 비서실장이었다. 그런데 전 대변인은 두 측근보다 적어도 한 뼘은 박 대표에게 더 다가선 것 같았다. 그런 그가 주시하라니 눈여겨봤다.

 김기춘 의원이 박정희 대통령을 보필했고 육영수 여사 저격범 문세광의 수사검사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박 대표의 측근다운 언행은 감지가 잘 안 됐다.

 ‘전 대변인 얘기가 이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 건 2005년 12월이다.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이 사학법을 강행 처리하면서 박 대표가 장외투쟁에 나섰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여론이 도와주지 않았고 날도 추웠다. 한나라당 내부에서 슬슬 반대가 늘었다. 그래도 박 대표는 강경했다. 그때 김 의원에게 전화를 걸면 “박 대표님 생각이야 내가 알겠소만은…” 하면서 사학법 투쟁의 논리를 설파했다. 며칠 뒤면 여지없이 같은 얘기가 박 대표 육성으로 들렸다.

 이듬해 9월 박 대표가 메르켈 총리와 파독 광부·간호사들을 만나러 독일을 방문했을 때 김 의원은 수행단으로, 나는 취재기자로 같이 갔다. 박 대표가 강연이나 연설을 할 때마다 김 의원은 맨 앞자리 한가운데에 앉아서 손짓을 해가며 실시간으로 조언을 했다.

 나는 속으로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싶었는데 기우였다. 연설이 끝날 때마다 김 의원은 “참 잘하셨습니다”라고 칭찬했고 박 대표는 환히 웃었다. 출장 마지막 날 박 대표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이 장면을 기억하는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김기춘 비서실장을 내보내는 마음이 어떨지 짐작이 간다.

 박 대통령과 가깝기로 따지면 누구에게도 안 밀릴 허태열 전 비서실장이 ‘윤창중 사건’으로 단칼에 날아간 걸 보면 김 실장에 대한 대통령의 신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사의를 표명하고 출입증을 반납하는 등 유달리 길게 느껴지는 사퇴 절차에 온라인 댓글이 꼬리를 문다. “불어터지는 짬뽕”이라는 비아냥과 “꼿꼿한 자세가 좋았는데…”라는 의견이 섞여 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포용 인사에 인색했다. 과거 중앙SUNDAY 인터뷰를 검색해보니 “능력이 있어도 믿을 수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이제 몇 달 후면 현 정부는 반환점에 다다른다. ‘믿을 수 있는 사람’만 써서 별 효과를 못 봤다면 이젠 ‘능력 있는 사람’도 써봐야 하지 않을까. 고비가 닥치면 김종인 박사같이 생각이 다른 사람도 여러 번 기용하지 않았는가.

 사학법 투쟁 당시 박 대통령을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꺼내준 사람은, 그가 가장 안 믿는 이재오 의원이었다. 원내대표에 당선된 이 의원이 ‘장내투쟁’을 외치면서 자연스럽게 장외투쟁은 끝났다.

 지금 우리나라에 절실한 건 믿음이 아니다.

강주안 디지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