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6)망언 재확인-제80화 한일회담(6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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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구보따」일본측 수석대표의 말에는 우리가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측의 홍진기대표는 그동안의 논전을 매듭지으면서 지금까지 「구보따」대표가 말한 5가지 논점에 대해 진의 여부를 재확인했다.
△홍진기대표=그러면 지금까지 「구보따」씨가 말한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겠다.
「구보따」씨는 카이로선언에서 연합국의 3거두가 「한국인의 노예상태에 유의해…」라고 지적한 것은 전쟁중의 히스테릭한 심리상태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에 살던 일본인들이 총독정치하의 특별한 보호와 혜택을 받아 축적한 재산을 2차대전후 미군정이 몰수하고, 또 60만 재한일인을 일본으로 내쫓은 것은 국제법위반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한국을 일본과 사전 상의 없이 일본에서 분리, 독립시킨 조치까지도 국제법 위반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으며 일제의 한국통치가 한민족에 혜택을 주었다고 주장했는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구보따」대표=그대로다.
△홍대표=그렇다면 이것은 대단히 중대한 발언이다. 우리측이 이 발언을 놓고 좀더 생각해야할 시간을 가져야 하겠으니 오늘 회의는 그만하자.
홍대표가 거듭 「구보따」대표의 진의를 타진했을 때 순조롭게 회담을 이끌 의사가 있었다면 「구보따」대표는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이를 정정하고 사과했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국제법 지식을 고수했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싸늘한 냉기에 휩싸였고 우리측 대표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홍진기·장경근·이상덕대표등은 심정이 착잡했다. 반성할줄 모르는 일본인들에 대한 분노로 목이멜 정도였다는 한 대표의 당시 심정을 나는 훗날 사석에서 들었다.
재산청구권 위원회의 우리측 대표들은 아자부 언덕배기에 있던 주일대표부 사무실에 돌아와 김용직수석대표와 다른 대표들에게 「구보따」의 망언을 우선 설명했다.
김수석대표등 우리측 대표들은 홍대표가 지적한 「구보따」대표의 발언이 우리측으로선 묵과 할 수 없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홍대표는 따라서 「구보따」대표의 망언으로 미뤄보면 일본측은 이 회담에 어업 및 평화선문제를 제외한 다른 의제에는 아무런 준비나 성의없이 임하고 있는 것이 확연하다고 지적했다. 홍대표는 더구나 2차대전후 강화조약전에 일본으로부터 우리의 분리 독립이 국제법 위반이란 「구보따」대표의 폭언이 공식회의 석상에서 거듭 확인된 이상 우리측이 그들의 술수에 말려들어 더이상 회담에 임할 하등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전제, 당장 회담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석대표인 김공사등 모든 대표들도 회담을 더이상 진행시킬 분위기가 아니라는 데는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나 김공사와 주일참사관이였던 유태하대표는 회담을 결렬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니나 우리 대표들은 본국의 훈령을 받아야하는 입장을 고려해 일단 본국에 조회하는 절차를 밟는게 순서가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래서 일단 본국에 사정을 알린후 훈령에 따라 움직이기로 한 것으로 나는 듣고 있다.
우리 대표단이 이같은 판단을 내린 또다른 요인은 회담결렬의 책임을 일본측에 명확히 돌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야 미국측도 회담결렬의 원인이 일본측의 고압적 태도와 무성의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할 것이 아닌가.
우리 대표들은 공식회담 석상에서 「구보따」대표의 망언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그에게서 사과와 철회를 받아내야 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그것은 회담결렬의 책임이 일본에 있음을 분명히 하려는 하나의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일본측이 순순히 응할리가 애당초 없음을 대표들이 잘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의 우리측 전략회의는 자정이 훨씬 지나서야 끝났다. 숙소로 돌아가는 대표들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허탈감 뿐이었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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