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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주금’의 3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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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 회사원 이모(42)씨는 국내 3~4개 대기업 주식을 10~100주 정도 보유하고 있는 소액투자자다. 여윳돈이 생길 때마다 주식을 한 두 주씩 사모았다. 이씨는 요즘 기업이 배당을 확대한다고 하고 주주친화정책도 적극적으로 펼친다는 소식에 시간을 내서 주주총회에 참석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는 주총일을 확인한 후 참석을 포기했다. 그가 투자한 회사의 주총일이 모두 다음달 13일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매주 하루 정도씩 휴가를 내서 주총에 참석하려고 했다”며 “주총 분위기를 보면서 투자할 가치가 있는 기업인지 판단하려고 했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2. 넥센타이어는 지난해까지 15년째 12월 결산법인 상장사 가운데 처음으로 주총을 열어 ‘주총 1호 신기록’을 갖고 있다. 올해는 아쉽게도 12일 주총을 연 현대약품에 ‘주총1호’ 자리를 내줬지만 이 회사는 17일 주총을 연다. ‘3월의 금요일’에 주총을 몰아치는 상장사와는 달리 이날 주총을 여는 회사는 넥센타이어가 유일하다. 이렇게 서둘러 주총을 열려면 전년도 12월부터 주총 준비에 들어가야 하고 직원이 새해 첫날(1월1일)에도 회사에 나와 결산 작업을 해야 한다. 이재영 넥센타이어 경영관리팀 차장은 “2000년 우성타이어에서 넥센타이어로 사명 변경을 하면서 경영진이 투명경영과 주주 중심의 경영을 펼치겠다는 생각에 따라 주총을 앞당겨 열고 있다”고 말했다.

작년도 쏠림 … 안건 5667개 중 부결 5개 뿐

 12일을 시작으로 상장기업의 주총이 본격 시작됐다. 하지만 ‘몰아치기 주총’으로 인한 ‘수퍼 주총 데이’ 현상은 여전하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12월 결산 상장사의 주총은 ‘3월의 금요일’에 몰려있다. 상장사 10곳 가운데 8곳이 ‘3월의 금요일(3월 13, 20, 27일)’에 주총을 연다. 삼성전자·삼성물산·삼성중공업·삼성생명·삼성증권 등 삼성 계열사는 일제히 3월 13일 오전 9시에 주총을 연다. 현대차·현대모비스 등 주요 현대차 계열사도 같은날 주총을 열 예정이다. 20일에는 네이버·만도·농심 등 수십 개 회사의 주총이 몰려 있고 27일에도 한국가스공사·NHN엔터테인먼트·엔씨소프트 등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12월 결산사 694개사 가운데 48.9%인 339개사가 3월 21일에, 22.3%인 155개사가 3월 28일에 집중적으로 주총을 열었다. 이렇게 주총이 동시에 열린 탓에 지난해 시가총액 상위 600개 기업의 5667개 안건 가운데 부결된 것은 5개에 불과했다.

 이처럼 주총이 특정일에 몰리는 이유는 주주 참여를 어렵게 해 의안을 쉽게 통과시키려는 기업의 숨은 의도와 사업보고서를 주총 승인 이후에 제출하도록 한 자본시장법 규정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돼 나타났기 때문이다. 자본시장법상 사업보고서 제출 기한은 사업연도 종료 이후 90일 이내다. 사업보고서는 주총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기업이 ‘결산→외부감사→주총 소집 공고→주총’으로 이어지는 일정을 서두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다른 날도 아닌 금요일에만 주총이 몰리는 것은 주주 감시를 피하려는 상장사간 ‘무언의 담합’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윤진수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박사는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상장사가 주총을 주주와의 소통의 장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요식행위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라며 “대만의 경우 주총일에 쿼터제를 도입해 기업으로부터 신청을 받은 뒤 특정일에 쿼터를 넘어서면 다른 날에 열게 해 주총을 분산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주주권 강화와 경영권 분쟁은 올해 주총의 핵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특히 국민연금의 의결권 강화에 모든 상장사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말 발표한 경제정책방향에서 국민연금이 배당 기준과 기업 명단을 만들어 투자기업에 배당 확대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금융위원회는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 강화를 위해 자본시장법 시행령을 개정했다. 이전엔 연기금이 기업의 배당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면 경영참여 목적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법 개정으로 연기금이 기업의 배당 결정에 영향력을 주더라도 경영참여 목적이 아닌 것으로 된다. 올해 국내 증시에 106조원을 투자할 예정인 국민연금은 ‘국내 증시의 공룡’이다. 지난해 말 현재 국민연금이 지분 5% 이상 보유하고 있는 상장사는 274개에 달한다. 시가총액 10위안에 있는 상장사 중 지분을 5% 이상 보유한 회사도 7개에 이른다.

 윤진수 박사는 “국내 증시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국민연금의 특성상 특정 기업이 주주친화정책을 펼치지 않는다고 해서 주식을 한꺼번에 팔아치우지 못한다”며 “대신 국민연금 가입자의 이익을 위해서는 배당 확대 등에 대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강도는 앞으로 더욱 세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해 정부의 배당유도 정책 등으로 국내 기업의 배당은 크게 늘었다. 하지만 아직 해외 기업의 배당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1일부터 올해 2월 5일까지 2014년분 현금배당을 공시한 상장사 수는 253개사로 전년보다 113개사(81%) 늘었다. 배당금 총액도 전년보다 3조9025억원(61%) 증가한 10조2751억원으로 나타났다.

경영권 분쟁 늘어 주총장 뜨거워질 수도

화기애애 미국 주총 … 두 달간 나눠서 열려 미국·영국·독일 등에선 상장사의 주주총회가 두 달에 걸쳐 분산돼 있다. 한국과 달리 주총 이전에 상장사가 사업보고서를 주주에게 공개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미국 상장사는 주총 40∼50일 이전에 소집 공고를 낸다. 이 때문에 특정일에 몰아치는 주총도 없다. 지난해 5월 4일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열린 버크셔해서웨이 주주와의 만남 행사에서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왼쪽)이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와 탁구를 하고 있다. [블룸버그]

 주요 기업의 배당성향을 보면 국내 기업과 해외 경쟁기업의 차이가 확연하다. 배당성향은 당기순이익 중 현금으로 지급된 배당금 총액의 비율로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 가운데 주주에게 배당으로 돌아간 금액이 얼마나 되는지를 뜻한다. 삼성전자의 배당성향은 2013년 7.2%에서 지난해 12.7%로 크게 증가했다. 반면 스마트폰 경쟁사 애플의 2013년 배당성향은 27.9%이다. 배당을 확대한 현대차의 배당성향은 2013년 6.2%에서 지난해 11.1% 늘었다. 하지만 GM(68.8%)과 폴크스바겐(20.6%)은 현대차를 크게 웃돈다.

 강송철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외국기업 대비 지나치게 낮았던 배당성향, 저금리 고착화에 따른 투자자의 배당확대 요구, 배당세 감면 등 정부의 배당증대 정책이 맞물리면서 한국 기업의 배당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상장사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시도 등 경영권 분쟁도 크게 늘고 있다. 상장사가 경영진 직무집행 정지·해임, 주주총회 소집허가 등 ‘경영권 분쟁 관련 소송을 당했다’고 공시한 건수는 2012년 25건, 2013년 37건에서 지난해 54건으로 해마다 늘고 있다.

 요즘 실적 악화 등을 이유로 2·3대 주주나 소액주주 연합 등이 힘을 합쳐 경영진 교체에 나서거나 경영 참여를 요구하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증권가에선 다음달부터 시작되는 주총 때 표 대결이 벌어질 상장사가 엔씨소프트, 일동제약, 신일산업을 포함해 수십 곳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최대주주 지분율이 15%에 못 미쳐 쉽게 경영권 분쟁에 노출될 수 있는 상장사는 120개(지난해 3분기 기준)에 달한다. 넥슨과 치열한 경영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엔씨소프트의 3월 27일 주총에 많은 투자자의 눈길이 쏠려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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